대화
- 엊그제는 이 일기장에 굉장히 긴 비밀댓글이 달렸다. 읽어보다 울컥 했는데, 그중 일부만 옮겨보겠다.
객관성이니 인간해방이니, 말이 파놓은 함정에 꼬꾸라지지 마세요. 제가 아는 락방님은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는 섬세한 독자이고, 건전하면서도 자주 사랑스러운 생각들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인데, 무엇보다 락방님이 탁월한 것은 공감능력이라고 늘 생각했어요. 저는 페미니즘의 대한 락방님의 관심도 역시, 그 시작은 희생자의 위치에 놓여있는 여자들의 삶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해요. 그게 '페미니즘' 이라는 거대한 프레임을 만나면서 업계의 어휘들과 현학적인 말장난, 소위 먹물들의 무한루프 말장난과 마주치신 걸텐데, 그걸 굳이 락방님의 '공부'가 부족해서 그렇다, 생각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사실 중요한 건 학습보다는 훨씬 더 공감일텐데, 락방님은 그런 재주는 타고 나신 분이니까.
나는, 아무리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맞는 것 같고, 객관성은 개소리 같다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에 확신은 갖고 있었지만 딱히 '이러이러해서 이렇다' 라고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던 차에 저 댓글은 나의 답답했던 마음, 내가 가진 생각을 너무나도 적확하게 표현한 게 아닌가. 내 페미니즘의 관심이 '희생자의 위치에 놓여있는 여자들의 삶'에서 시작됐다는 것, 그러므로 학문적으로 접근한 먹물들의 말이 파놓은 함정에 꼬꾸라지지 말라는 것. 시작과 흐름과 그리고 지금의 고민 혹은 빡침 까지 저기에 다 들어있는 거다. 가슴이 시원해졌고, 또 너무나 고마웠다.
뭔가 불끈불끈 용기도 나고 힘도 나고 그래서 알라딘에 뭐라뭐라 따지는 변명의 글을 올리고 싶었지만-'천연덕스럽게 revenge porn을 봤다'는 표현은 정말 마음이 아팠다, 나에 대한 경멸이 느껴져서 엄청 상처가 됐다- 뭔가 거기에 글 쓸 의욕도 안생기고, 또다시 이걸로 말섞고 싶지 않아서 관뒀다. 천연덕스럽게, 라니. 어떻게 저렇게 표현할까, 나를. 하- 됐고.
암튼 요즘 내게 데이트폭력이 너무 큰 충격이어서, 게다가 천역덕스럽게 리벤지 포르노 본 사람이 되어버려서, 스트레스를 대박 받고 있던 상황에서 컴퓨터까지 뻑이 나버리더라. 난 스맛폰이나 컴터 같은 기계장치가 내 마음대로 안되면 또 스트레스를 너무 받는 사람이라서, 진짜 최근에 스트레스가 대박이었다. 휴... 오늘은 새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고, 좋은 댓글도 읽었고(위의 댓글 말고도 저런 취지의 댓글과 말들을 여러차례 들었다), 조금 안정이 된다.
- 어제는 남동생과 퇴근후에 만나 술을 마셨다. 뼈찜을 앞에 두고 우리는 서로 주거니받거니 얘기를 했다. 연애에 대한 얘기부터 가십에 대한 것까지 이것저것 수다를 떨었는데, 연애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나는 남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전까지의 나는 한 사람이 내가 원하는 전부를 다 채워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언제나 연애를 하면서도 오픈된 상태였다, 그래서 다른 누구를 또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크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그것은 내가 내 중심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이런 자세로 연애해왔고,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연애에 크게 에너지를 쏟고자 하는 욕망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연애에서는 내가 다른 곳을 향해 열어두었던 문을 다 닫아걸어도 된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한 사람만으로 다 충족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혹여라도 나중에 또 문을 열어두고 다른 사람을 기다리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한 사람에게 오롯이 집중하는 게 가능하다' 라는 말을 한거다.
대부분 '남자들은 바람 필 기회를 마다하지 않는다' 라는 뉘앙스의 말들을 많이들 하는데, 나는 이역시 자신이 충족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그러니까 바람을 피는 게 남자들의 특징 같은게 아니라 충족되지 않은 욕망의 발현이 그렇게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는게 아닐까 한다는 거다-말이 어렵다..여튼). 한 사람만으로 충족되는게 쉬운 일도 아니며 또 인생에서 매우 자주 일어나는 일도 아니지만, 누군가와 커플로 지내고 있다면, 그런 충족되지 않음에도 신의를 지켜 한눈 팔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일테고, 신의보다는 자기 욕망에 충실해서 오픈된 상태로 이 부분은 이 사람으로부터 저 부분은 저 사람으로부터 채우려고 하는 게 아닐까. 뭐 이런식의 이야기들을 남동생에게 했는데, 내 말을 들은 남동생은 내게 말했다.
누나가 그렇게 느끼고 있다면, 누나는 지금 행복한거네.
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어쩐지 부끄러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그러다 서로 잘난척을 하면서 너는 이해력이 부족해, 나는 암기력이 부족해 이러고 서로 갈구다가, '내가 관심있는 분야는 누나보다 더 내가 잘알지 않겠냐'는 말이 나왔다. 그래서 내가 그런게 뭐있어? 하니 스포츠? 하는 거다. 맞아 인정. 또? 연예? ㅋㅋㅋㅋ 그래 인정. 그리고 내가 받았다. 문학과 사회 에 대해서는 내가 너보다 많이 알걸? 이러고 같잖은 잘난척을, 정말이지, 우리 둘만 있으니까 할 수 있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남동생이 그러는거다.
성인에 대해서는 내가 누나보다 많이 알 걸?
그래서 내가 그랬다.
야, 그건 장담하지마. 나 만만치 않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자 남동생이 강동역 이바돔감자탕 집에서, 조용히 얘기하자, 라고 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최근에 지인이 연애를 시작했다가 쫑내기로 결심했다. 대화가 통화지 않는다는 것. 이 말이 오고 다른 말이 오고 적절한 리액션들이 보여지고 하는 것이 불가능해서 자꾸 위축되고 주눅들고, 만나면 점점 좋아져야 되는데 주눅드는 게 나아지질 않아 관둬야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거다. 반면 최근에 연애를 시작한 다른 친구는, 이렇게나 대화를 많이 나눌 수 있다는 데서 큰 만족감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사소한 것들, 정말 별 거 아닌 것들, 이를테면 영화 볼거야, 뭐 볼거야? 이거 볼거야, 그 장르 좋아해? 다 보고 나서는 다 봤어, 어땠어, 어떤 영화였는지 얘기해줘 등의 같은 대화들, 사소한 걸 말하고 또 들을 수 있다는 것이 크게 만족스럽다는 거다. 그래서 내가 그거 뭔지 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나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많다는 사실이 떠올라 좋아졌다. 회사에서도 수다를 떨 사람이 있고, 집에서도 그렇다. 애인은 내 이야기를 가장 잘 들어주고 기억해주며, 나의 친구들 역시 대화를 나누기에 즐거운 상대들이다.
대화가 중요하다.
요즘 데이트 폭력이며 페미니즘 운운하는 '공부한 자들'의 말장난들에 크게 지쳐 정말이지 남성혐오에 이를 지경인데, 그렇지 않은 남성이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어제 B 에게는 '너와 T 님 덕에 남성혐오를 하지 않을 수 있어 라고 말했다), 이렇게 온갖 것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생각을 나누며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어서 남성혐오까지 가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중심을 단단히 잡고 땅 위에 단단히 설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