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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가 함께한다면 아주 좋을거라는 생각을 매우 자주 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또 서로와 이야기나누는 걸 너무나 좋아하니, 각자의 일과를 끝내고 마주 앉아 시시한 이야기부터 속 깊은 얘기까지 언제나 잘 나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커플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와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을 아주 많이 했다. 그것은 결혼이어도 좋을 것이고 동거여도 상관 없었을 것이다. 혹은 그런 식으로 한 집에 함께 사는 게 아니라 가까운 곳에 따로 살아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에게로 가서 살 마음을 먹었었다. 그 먼 데로 갈 생각이었다. 그거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이곳의 모든 걸 버리고 간다거나 포기하고 가는 게 아니라, 여기엔 이 모든 사람들을 둔 채로 거기에서도 살면 되는 거니까. 나는 그의 옆에서 그와 함께 지내면서 매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러다가 가끔은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다니러 가면 되는 거니까. 그동안 모은 돈을 가지고 일단 그곳으로 가서 또 밥벌이를 할 일자리를 찾아서 그곳에서 지낸다면, 한국에 왔다갔다 할 돈은 내가 마련할 수 있을테니까. 그렇게 가끔 와서, 그러니까 일 년에 두 세번이 될 수도 있고 한 번이 될 수도 있고, 내가 다녀오고 싶다, 조카들 보고싶다, 라고 생각되면 훌쩍 날아갔다가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는 삶을 살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출산과 육아를 원하지 않았었고 앞으로도 내가 그걸 원할 것 같진 않지만, 가끔 그가 자식에 대한 언급을 할때면, 이 사람과 함께라면 어쩌면 출산과 육아도 버틸만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 대화나누는 걸 아주 즐기는 사이이니,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에서 생기는 어려운 점이라든가 힘든 점들 역시 대화로 좀 줄어들 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어려운 게 있다면 그에게 얘기하고 또 그가 어려운 게 있다면 나에게 얘기해서, 그렇게 우리는 지혜롭고 슬기롭게 어려운 점들을 이겨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오늘은 기분이 너무 나빴어, 왜? 이러면서 대화를 시작하다가 결국에는 웃으면서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던 거다. 나는 그렇게 그와 언젠가는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에게는 말하질 못했었다. 그는 아직 학생이고 자신의 처지가 안정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거기다 대고 나는 당신이랑 살고 싶어, 라는 식의 말을 한다면 혹여라도 얽매이는 기분이라든가 압박감을 느낄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나는 그에게 언제나 그가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도록 하고 싶었다. 지금 너는 나에게 어떤 책임감이나 압박감을 전혀 느낄 필요가 없다는 걸, 그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상황이 허락한다면, 그때가 된다면, 그러니까 그게 언제가 되든지, 그래서 혹여라도 나에게 너 여기 와서 살 수 있겠니, 라고 묻는다면, 응! 이라고 단번에 대답할 작정이었다.
그런 한편, 그를 놓아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 그를 위해서는 그게 나을 거라고.
만약 누군가 나에게 '생리가 아주 끊어진다면 여자가 아닌 것 같아 우울할거야' 라고 말했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그랬을 거다. 생리를 한다는 게 여자임을 보증하는 게 아니라고, 생리는 삶의 숱한 많은 과정들 중 하나일 뿐이고, 너는 그걸 이제 끝낸거라고,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여전히 너는 여자이고, 그것이 너의 여성성과 여성적 매력을 감소시키진 않는다고, 그러니 그런 우울한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말할 것이다. 그건 못난 생각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알고 있는 것과 직접적으로 느끼는 것은 달랐다.
생리 일수가 짧아지고 생리의 양이 적어질수록 나는 많이 우울했다. 이러다가 곧 폐경이 오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의 폐경에는 완경이라 말하겠지만, 나의 생리가 끝나는 것을 나는 폐경이라 느낄 것 같았다. 생리가 끊긴다면, 나는 내가 여성적인 매력이 떨어질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나는 자꾸 나의 여성성이 사라진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동안 내가 선택하지 않아서 나랑 관계가 없었던 임신과 출산이, 이제는 선택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여성적 매력이 얼마 안되어 사라질 것 같아 두려웠다. 이게 못난 생각이란 건 아는데 스스로는 그랬던 거다.
그래서 애인을 놓아주어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최근에 자꾸 했다. 나는 임신과 출산에서 멀어졌고, 그가 원하는 것들 중에서 어떤 것들을 해주지 못할텐데, 이렇게 내가 이 사람을 잡고 있어도 되는가, 조금 더 건강하고 젊은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보내줘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병신 같은 생각을 했던 거다. 노화는 나뿐만 아니라 그에게도 진행되고 있는데도 그랬다. 나만 혼자 늙어가는 게 아닌데, 그도 늙어가고 있는데, 나는 자꾸만 내가 여성적 매력이 떨어지는 것에 위축되어 그를 놓아주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만약 내가 이런 고민을 그에게 말했다면 그는 분명히 말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너의 여성적 매력이 반감되는 게 아니다, 너만 늙어가는 게 아니라 나도 늙어가고 있다, 나는 너를 좋아하는 거지 니가 임신과 출산이 가능해서 좋아한 게 아니다, 왜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냐, 라고. 그는 그렇게 말할 사람인 걸 알고, 또 그 말이 맞다고도 생각하면서도, 내가 혼자 쪼그라들었던 거다. 그는 독신주의자도 아니니까,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가정을 꾸리고 싶을 테니까,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고 싶을테니까, 그러기에 나는 좀 부족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던 거다.
그러나 나는 당신과 함께 살고 싶다고 말하지도 못했던 것처럼, 나의 여성적 매력이 떨어질까봐 두렵다는 말도 그에게 하지 못했다. 그는 신경도 안쓰고 있는데 내가 부러 문제를 만드는 게 되는 것 같아 그러지 않았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말하면 코끼리가 생각나는 것처럼, 신경쓰지 않고 있다가 내가 만약 내 여성적 매력 운운하는 순간, 그때부터 그것이 우리 사이에 어떤 암묵적인 고민 같은 것이 될까봐 걱정됐다. 그래서 이 얘기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매일 아주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 못한 얘기들이 있었구나.
그러나 내가 고민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우리는 헤어졌다. 그는 내게 이 관계를 정리하고 싶다고 말했고 나는 알겠다고 했다. 나는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한다. 그와 나는 아주 많이 다르지만, 그와 내가 닮아있는 점도 분명히 있다. 다른 사람을 이해시킬 순 없겠지만 나는 이해할 수 있다.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도 있었지만, 이미 준비를 한 사람에게 다른 어떤 말들이 닿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니 부질 없는 짓이겠더라.
이제 아이폰을 굳이 안써도 되겠구나, 생각했다. 이제 일본에 가도 되겠어, 라고도 생각했다. 여름 휴가는 다른 데로 가도 되겠네, 라고도 생각했다. 그렇지만 나는, 아이폰을 쓸 거고, 일본에도 안 가겠지. 호주행 비행기는 아직 취소도 못했다.
회사를 어떻게 가지, 출근은 어떻게 하지? 이렇게 기운 없고 툭하면 질질 우는데, 회사에 가서 어떻게 버티지? 그냥 사표를 낼까? 이 생각을 제일 많이 했다. 내가 이 기분으로, 지금 내가 아픈데, 가서 고개를 숙이고 네네, 할 수 있을까. 이런 기분으로 아침에 일어나 늘 가던것처럼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사무실에 도착해야 하나. 그리고 하루종일 책상 앞에 앉아있어야 하나.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할 것 같은데. 퇴사를 할까. 퇴사를 하고 퇴직금 받아서 당분간 어딘가로 가 있을까. 나 진짜 출근해서 일 못할 것 같은데. 나는 이제 어떡하지?
몇 해전 여름 휴가에 영월에 묵었을 때, 처음으로 악플이 달려서 핸드폰으로 확인하고 우울했던 게 생각났었다. 그랬는데 이번엔 영월에서 이별을 했네, 왜 하필 내가 영월에 왔지? 나는 왜 <러브, 비하인드>를 보았지? 왜 그 영화에서 봤던 일이 그대로 내 일이 된거지?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달라졌을까? 영월에 오지 않았다면 달라졌을까? 늘상 하던 여행인데 이번에는 유독 기다려진다고, 그렇게 친구에게 말했었는데, 그런데 보란듯이 이별이네.
내가 그를 충분히 다독여주지 못했을까? 내가 조금 더 조금 더 조금 더... 그는 내가 여전히 좋은 사람이고 이야기나누는 것도 좋다고 했지만, 나는 자꾸만 내가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잘못한걸까를 되짚어 보게 된다. 그렇지만 나도 안다. 우리가 헤어진 건 그의 마음이 예전같지 않아서라는 걸. 그런데도 나는 마치 이것을 해결가능한 문제로 만들어보고 싶어서 내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를 곱씹어보게 된다. 문제는 해결하면 되는 거니까.
이별은 처음이 아니다. 나는 그간 이별을 겪으면서 번번이 이별이 아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간의 이별을 겪고나서는 '아 나를 사랑해줄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까?'를 생각했었는데 이번 이별을 맞닥뜨리고서는 '아, 내가 이렇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또다시 가능해질까?' 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의 나를 위해서 뭘 할 수 있을까? 내가 뭘 해야 내가 좀 괜찮아질까? 아무런 방법이 떠오르질 않는다.
금요일에 강원도 가는 길에 바디버터를 샀었다. 그리고 도착해서 샤워하고는 열심히 발랐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도 발랐다. 그리고 이별을 맞닥뜨리고 바디로션도 바르지 않았고 화장도 하지 않았고 드라이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기차를 탔고 청량리 역에 내려서 택시를 탔다. 지하철을 타고 갈 기운이 없었다. 택시에 앉아서 목적지를 얘기하고 또 울었다. 기사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달라진 건 없다. 그를 만나기 전의 일상을 살면 된다. 그를 만나기 전에도 나는 회사를 다녔고 밥을 먹었고 커피를 마셨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었다. 그랑 헤어졌다고 해서 이게 불가능한게 아니다. 그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 그렇게 살면 된다.
라고 말해봤자 말짱 거짓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