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고백의 정석

ssabine 2016. 9. 15. 01:51

봄씨는 봄부터 나에 대한 마음이 달라졌다고,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고 했다. 내가 좋다고 고백하며 '많이 좋아합니다' 라고 했다. 그리고는 우리가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그런 말을 들으려고 만났던 게 아니었고, 그런 말이 나올거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정말 놀랐다. 그 앞에서 좋아한다는 고백 앞에, 와우, 정말 육성으로 그렇게만 말했다. 놀라서, 충격이어서, 다른 어떤 말을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도 모르겠더라. 부담을 준거 같아 미안하다고, 그렇지만 오늘은 꼭 말하고 싶었다고 해서, 나는 아, 너무 놀라서 그렇다고 말했다. 그리고 고맙다고 했다. 말해주어서 고맙다고. 그리고는 머릿속이 분주해졌다. 나는, 이제, 어쩌지?


그래서 두서없이 이 말 저 말을 했다. 아, 저는 생각을 좀 해볼게요,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조금 기다려줄래요, 라고. 그동안의 나는, 누군가가 '널 좋아해, 사귀고 싶어'라고 말했을 때, 그렇다 혹은 아니다라고만 답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대고 시간을 좀 달라는 말은 부질없는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자기도 좋으면 사귀는거고 싫으면 아닌거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대체 뭐람, 그건 그냥 싫다는 완곡한 표현이 아닌가 하고.  그런데 그런 내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한거다. 봄씨는, 네 물론이지요, 라고 말했다. 그렇겠지요, 라고도 말했다. 역시나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는 진짜 아무런 생각도 나질 않았다. 뭐가 좋을지. 내가 이 사람과 연애를 해야할까? 아니, 하지 말아야 할까?


진짜 1도 모르겠더라. 어느쪽으로도 아무런 생각이 들질 않았다. 내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그래서였다. 어느 한 쪽으로라도 약간 기울면 그쪽으로 대답을 하겠는데, 진짜 모르겠는 거다. 나는... 뭘 원하는 걸까? 내가 이 사람한테 뭐라고 답해야 하는걸까? 나 역시 싫지 않으니 이 사람을 만났던건데, 대화하는 걸로 치자면 정말 쉴 새없이 주고받고를 하는데, 그렇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하지 않나? 그렇지만 이렇게 갑작스럽다니, 내가 이 사람과 아무리 대화가 잘 통한다한들, 연애를 원하는걸까? 나는 이 사람과 거리를 걷고, 손을 잡고, 섹스를 하고, 함께 눈을 뜨고...를 하고 싶은 걸까? 아, 진짜, 생각의 진도가 안나가는 거다.


저 연휴동안 생각좀 해볼게요, 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설사 제가 거절을 말해도, 우리가 지금처럼 계속 만나서 술도 마시고 대화도 나누고 친구였으면 좋겠어요, 라고. 봄씨는 물론이라고 말했다. 부담을 주고 싶은 게 아니라고, 그런데 많이 좋아해서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거절해도, 계속 지금처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집에 데려다주고 싶다는 그에게 아니라고 말했고 그는 알겠어요, 라고 말했다. 우리 동네에서 술을 마셨고, 나는 집이 가까웠지만, 봄씨의 집은 아주 멀었다. 지금 지하철을 타도 한참 갈텐데 무슨 집엘 데려다준담.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안에서 정말 데려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내가 싫다고 하니 알았다고 하고 그냥 간거다. 그 점이 고마워서 그래요, 다음엔 데려다줘요, 했다. 그리고 나는 생각을 해야 했다. 내 대답은.. 어쩌지??



그러다 문득 기분이 좋다, 했다. 이렇게 정석적인 고백을 들어본 게 얼마만인가. 처음인가?? 하고 갸웃하고 과거의 연애들을 들춰보았다. 언젠가부터는 너를 좋아해 사귀고 싶어, 라는 말 없이, 만나자마자 섹스를 하게 되어서 그러다보니 사귀게 된다거나, 자연스레 만남이 반복되어 사귀게 됐다거나 했는데, 그래서 이런 정석, 당신을 좋아합니다, 사귀고 싶어요, 와 좀 멀어졌던게 아닌가. 그런데, 와, 내가, 나이가 마흔인데, 여전히, 누군가로부터, 당신을 많이 좋아합니다, 라는 말을 듣다니. 와. 이건 정말 와우- 하게 되는 일이 아닌가. 고맙고 감사했다. 이 나이에도 내가 매력적이라고 느껴지고 뭔가 좋은 거다. 후훗, 거봐, 내가 이래, 하는 생각도 들고. 게다가 그의 정중한 고백은 무척 좋았다. 진지하다는 느낌을 줬고, 충동적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는 나를 아마도 봄부터 좋아했더 것 같다고 했다. 오, 봄에, 어쩌다가...



그리고는 오늘 하루종일 내가 어떤 대답을 해야할지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대답이 되었든 그가 대답을 들어야 일상을 지내기가 수월할텐데..나는...어쩌고 싶은 걸까.


나는 그가 좋다. 만나면 끊임없이 대화를 나눠서 좋다. 그러니 여태 만남을 유지해왔다. 만약 그랑 연애를 하게 된다면 나는 안정적이고 편안하며 싸움 없는 연애를 하게 될 것이다. 물론, 실제로 하게 됐을 때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게다가 연애가 좋다. 전적으로 내 편이 생기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무조건 내 말을 듣고 수긍해주고, 우쭈쭈, 오구오구, 해준다는 건,  타인에게 받을 수 있는 최대치가 아닌가. 게다가 함께 하는 잠자리는 덤이다. 아, 연애는 좋다. 그런데,


나는 지금 비연애 상태라서 행복한 점도 분명히 있다. 내 앞에 놓인 모든 주말과 연휴와 퇴근 시간 후가 모두 내 몫이다. 내가 알아서 내뜻대로 결정할 일이다. 이것은 사실, 비연애를 선택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다. 나는 이 자유가 정말 너무나 좋다. 이별에 가슴 아파하다가도 그렇지만 나는 자유야, 라는 생각을 하곤 하는 것이다. 그뿐인가. 나는 이러저러한 남자들을 자유롭게 만나고 다녀도 된다. 남사친 1, 남사친2, 남사친 3... 모두 내가 원하는 때에 만나 원하는 얘길 하고 원하는 시간에 집에 들어가도 된다!! 연애를 하지 않으면 섹스가 없지만, 살아보니, 섹스를 하지 않는다고 지구가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내가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섹스는 하면 좋지만 안해도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무엇보다,


내가 좋은 애인이 될 자신이 없다. 상대에게 열중을 하고 최선을 다하고 애를 쓰는 걸, 내가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내가 이 사람고 사귄다면 아니, 이 사람이 아니라도 다른 누구와 연애를 시작한다면, 나는 과거의 연애를 다시 반복하게 될 것이다. 좋게 말하면 쿨하고, 나쁘게 말하면 이기적인 연애를. 그간 파악한 나란 인간은, 내가 좋아해야 내가 상대에게 미쳐야 최선을 다할 수 있었던 거다. 아, 나는 좋은 애인이 될 수 없어. 항상 다른 남자를 생각한 채로 그동안 연애를 해왔지만, 앞으로는 그러면 안되는 게 아닐까. 다른 남자를 생각하면서 연애를 하는 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나...


그래, 그렇다면 지금처럼 좋은 남사친이라 생각하고 지내자, 했다가..그게 가능할까 싶다. 상대가 나에 대해 어떠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전처럼 지낼 수 있을까...나는 할 수 있지만, 우리 둘다 그게 그게 아니라는 걸 사실은 의식하고 있지 않을까....아아..나는 어쩌지...



꿈을 꿨다.

꿈에서 나는 봄씨에게 그래, 연인이 되자, 고 했다. 그렇게 그와 사귀다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더라. 내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다른 남자와 결혼식장에 들어갔다. 결혼식장에 들어가면서, 나는 이랬어야 해, 라고 생각했고, 그러면서 동시에 아아, 봄씨를 어쩌지, 너무나 미안하다, 생각했다. 아아, 나는 이런 꿈까지 꾸는데 어떡해야 할까. 연애를 끊고 섹스를 끊었다고 생각했으니, 그냥 계속 끊어야 할까. 내 편이 생기는 달콤함을 선택해야 할까. 와- 나는 진짜 모르겠다. 하루가 지났는데, 아직도 여전히, 어떤 대답을 해야할지 진짜 모르겠다. 내가 어떡해야 하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