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혈
- 나는 보쓰의 비서 역할도 하면서 작은 법인을 하나 맡고 있는데, 지난주 수요일과 목요일에 회계 중간감사가 있었다. 이 대응을 다 내가 해야했는데, 내가 하던 일이니 대응하는 거 별 거 아니다 싶으면서도 계속 묻는 말에 대답하고 원하는 자료를 주고 하는 일들이 스트레스였다. 수요일에 그렇게 감사를 받고 퇴근 후에 페미니즘 강의를 듣고 또 목요일이 되어 감사를 받는데, 점심을 먹고난 후에는 계속 대응하는 게 너무 스트레스인거다. 아, 지친다, 힘들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네 시쯤이었나, 업무상 전화를 받는데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아서 앞으로 머리가 쓰러지는 거다. 아주 잠깐, 0.2초정도 되는 시간이었고, 그렇게 앞으로 핑 쓰러지려다가 다시 제대로 돌아와서 멀쩡해지긴 했는데, 이 경험이 내게는 아주 무서웠다.
헌혈하러 갔을 때 무슨 수치가 모자라서 빈혈이라고, 헌혈할 수 없다고 해서 돌아왔었는데, 그렇다고 실제로 내가 일상을 살면서 빈혈로 인해 어떤 불편함을 느낀 적은 없었고 실감한 적도 없었다. 아, 앉았다 일어날 때 간혹 핑- 한 적은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이렇게 갑자기, 앉아있으면서 핑 하고 머리가 앞으로 쓰러지는 경험은 처음이라 정말 낯설고 무서웠다. 아, 이런 게 빈혈이라는 거구나. 사람들이 이렇게 쓰러지는구나 싶었다. 조만간 내과를 가든지 해서 검사 받고 철분제 처방 받아 먹어야겠네...라고 생각했는데, 주말에 친구들 만나서 이 얘길 하고 또 엄마한테도 어제 이 얘길 하니, 어떤 병적인 증상은 아닌 것 같고, 일시적으로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그렇게 된 것 같다고 했다. 지난주와 지지난주에 내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은 건 분명 사실이니까. 일시적인 것 같으니 일단 두고봐도 될 것 같다는 거였다. 나 역시 그렇게는 생각했지만, 뭔가 서럽기도 했다. 내가 실감할 수 있는 어떤 증상이 내게 나타났다는 것이, 아아, 이렇게 늙어가는건가, 늙음의 현상인가 싶어서... 자꾸자꾸 내가 늙어가는 게 내 눈에 보인다. 새치가 생기는 것도 그렇고, 요즘엔 예전보다 잠자는 시간이 빨라진 것도 그렇고, 생리의 양이 줄고 생리일 수가 적어진 것도 그렇고, 그리고 이젠 이렇게 빈혈증상까지 생겼네.. 이건 일시적인 거겠지만, 그래도 이런 일시적인 증상, 예전엔 없었잖아.....
지금보다 더 잘 먹어야겠다.
- 내가 끌어안고 있는 보쓰라는 폭탄에 대해 생각한다. 요즘 출근하기 너무 싫고(예전에도 싫었지만), 회사에 와서는 저렇게 폭탄과 한 공간에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어마어마한 답답함을 느낀다. 진짜 가슴속이 답답해져. 당장이라도 퇴사하고 싶은 거다. 난 진짜 주변에 좋은 사람들 많고 다 내 편이 되어주려고 해서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느끼지만, 이 커다란 폭탄을 감당하는 게 지친다. 게다가 이 폭탄은 나랑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 누구보다도 더... 집에 가서 식구들과 있는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이 사람하고 보내. 이게 너무 지독한 형벌이라 신은 내게 좋은 사람을 잔뜩 주신건가 싶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 많다 해도 이 폭탄 감당하는 거 너무 힘들어. 폭탄 제거해줄테니 좋은 사람 몇 포기할래? 물어보면, 나는 또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할 수는 없겠지만, 왜냐면 지금 좋은 사람들 중 누구도 포기할 수가 없으니까, 그렇지만 이 폭탄은 내 인생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누구나 폭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누구나 저마다의 폭탄이 삶을 힘겹게 만들고 있는거겠지만, 그래도 이 폭탄 너무 지독해 ㅠㅠ 어마어마한 폭탄이다 ㅠㅠ 핵폭탄이야. 핵폭탄인데 나랑 너무 오래 함께 있어. 하아- 나는 얼마만큼의 위험부담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가 ㅠㅠㅠㅠㅠ
어제 엄마랑 남동생이랑 이런 얘기하고 있노라니 엄마가 '그럼 회사 그만둬, 당장 때려쳐'라고 하셨다. 안돼 엄마, 내가 여행간다고 할부 긁어놓은 게 얼만데 그만 둬 ㅠㅠ, 라고 하니 엄마가 '그거 엄마가 다 갚아줄게 그만둬!' 라고 하셨다. 좋은 엄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