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6. 22. 07:29


탈장 수술은 큰 수술이 아니라고 했다. 양쪽으로 다 탈장이 진행되어 양쪽을 다 수술한다고 했지만, 한 쪽에 걸리는 시간은 40분이 좀 넘는다고 했다. 수술후에 금세 움직일 수도 있다고 했고. 그래서 나는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엄마가 정말 큰 수술을 몇 차례 했던 경험이 있었는데, 그에 비하면 이건 너무나 간단하니 얼마나 좋은가, 게다가 시간도 얼마 안걸리고 회복도 빠르다니, 나는 하나도 우울하지 않았다. 어제 연차를 내고 병원에 갔는데 급한 환자를 먼저 수술해주느라 우리 아빠가 뒤로 밀렸다고 하더라. 아빠는 이게 다 빽이 없어서 뒤로 밀리는 거라고 했는데, 나는 이것보다 위중한 환자를 먼저 봐주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하고 화도 안났다. 그리고는 혹시 손님이 올 경우를 대비해 음료를 사놔야겠다 싶어 집 근처의 홈플러스로 슬슬 움직였다. 몇 차례 엄마 입원의 경험으로 보자면 누군가 사왔던 음료, 우리가 사놨던 음료는 분명히 남게 되어 있는데, 그럴 경우 집에 가져오면 유통기한이 다 지나가도록 우리는 그 음료를 먹지 않더라. 대체적으로 꼬마병에 든 오렌지나 포도 쥬스 등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음료를 준비하되, 남겨서 집에 가져올 경우에도 먹을 만한 것으로 사자고 생각했다. 그래, 두유를 사자. 두유를 사서 남으면 집에 가져가고 그리고 그건 식구들 모두 먹는 음료니까. 그렇게 발걸음도 가벼웁게 홈플로 갔다. 날씨도 좋았고, 평일 오전이어서, 심지어 기분이 좋기까지 했어! 아빠가 수술인데 기분이 좋아도 되나 싶을만큼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도착한 홈플은 문이 닫혀 있었고, 아아, 홈플이 오전 열 시에 문연다는 건 몰랐구먼...하고 이를 어쩌나...하다가, 그 앞에 있는 스벅으로 들어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사서는 기다렸다. 그렇게 마트의 문이 열리고 나는 두유를 사가지고 병원엘 다시 갔다. 병원에는 고모가 와 계셨고, 나는 엄마와 고모께 두유를 하나씩 드렸다.


열두시쯤 다 되어서 아빠 차례라고 준비하라고 했다. 아빠는 물론 탈장 때문에 고통스러우셨지만 움직일 수 있었고, 자, 이제 수술하러 가자, 하는 기분 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수술실로 이동하는 침대에 아빠를 누우라 하고는 담요를 덮고 직원분이 옮겨주시는 순간, 그때 갑자기 기분이 너무 이상해졌다. 왈칵 눈물이 고이는 거다. 아, 이건 뭐지... 그러니까 엄마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 나는 엄청 울었었는데, 그건 큰 수술이었고, 아빠는 큰 수술도 아닌데, 왜 이런 기분이 들지, 하고 너무 당황스러웠다. 가까스로 눈물을 참고 고개를 드니, 엄마는 이미 저쪽에 혼자 가서 펑펑 울고 계시더라. 아 엄마...나는 엄마께 내가 가방에 챙겨두었던 손수건을 드리고, 엄마가 우니까 나도 울잖아 ㅠㅠ 하면서 같이 울었다. 나는 그나마 눈물을 조금 흘린 정도였는데 엄마는 그냥 주루루룩 우심. 그래놓고 수술실로 아빠 들여보내고서 엄마는 고모 품에 안겨 다시 엉엉 우셨다. 어휴.. 힘들었어.....


엄마는 아침을 일찍 드셨고, 고모도 오셨던 바, 보호자대기실에서 전광판을 보니 우리 아빠가 '수술대기중'에서 '수술중'으로 바뀐지라 밥을 먹자고 했더니 엄마는 '남편을 수술실 들여보내고 무슨 밥이냐' 고 하시더라. 어휴. 굶을 작정이군. 그래서 나는 '엄마, 고모도 식사 하시게 해야지' 하고는 '나가자'고 했다. 교대로 다녀오는 게 좋을듯했는데, 교대로 가면 엄마도 고모도 뭐랄까, 식사를 안하시려 할 것 같은 거다. 간단한 수술이라니까 뭐, 하고는 엄마와 고모를 모시고는 병원 근처에 있는 <이남장 설렁탕>에 가 설렁탕을 세 그릇 시켰다. 걱정할 다른 가족들을 위해 단톡방에 수시로 상황을 알렸는데, 밥 먹으러 왔다니 제부랑 여동생이 죄다 '교대로 갔어야지' 라고 한다. 나도 알어.. 내가 '모시고 오지 않으면 식사 안하실 것 같아 그랬어' 라고 하니 '언니는 시켜만 주고 들어가' 라고 하더라.. 아...맞는 말인거 다 아는데 순간 빡침이. 그래서 더이상 대꾸 안하고 그냥 밥을 흡입했다. 엄마한테는 '고모랑 천천히 드시고 올라와, 내가 들어가 있을게' 했다. 나였어도, 여기에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면 '교대로 가는 게 낫지' 라고 했을테지만, 정작 듣는 나는 짜증스러웠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중간에 혹시라도 잘못되어서 보호자 찾을 수도 있는거고, 나도 처음부터 교대로 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잖아... 그게 더 낫다는 거, 나도 알잖아...



두시간이 조금 지나 아빠가 수술실에서 나왔다. 수술은 잘됐다고 했다. 다섯시까지는 잠들면 안된다고 했고 호흡을 크게 하라고 하더라. 일곱시 전에는 소변을 반드시 봐야 했고, 아홉시 넘어서 물이며 식사가 가능하다고 했다. 나와 엄마는 아빠 옆에서 계속 말을 붙였고, 아빠는 '아파서 잠도 안와'라고 하셨다. 손을 잡아보니 아직 정신이 채 들기 전의 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으시더라. 마취가 아직 깨지 않아 손이 무척 차가웠다. 



제부는 입원했을 때부터 수시로 전화를 했고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어제는 엄마 핸드폰의 문자메세지가 울렸는데, 제부로부터 오십만원이 입금됐다는 문자였다. 엄마가 이게 뭐냐 전화해 물으니, 병원비에 보태시라는 거였다. 나는 진심으로 고마웠다. 일전에 엄마가 큰 수술 하실 때도 선뜻 백만원을 보내줬더랬다. 나는 진심으로 고마워서 신경써주어 고맙다고 말했다. 엄마도 고마워했다. 정말 진심으로 고마웠다. 제부가 이럴 때 선뜻 큰 돈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란 게 참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 내가 결혼했고 내게 남편이 있었다면, 내 남편은 이럴 때 선뜻 오십만원을 송금하는 사람이었을까?' 라고. 음..나는 그게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전에 백만원 보낸 건 또 액수가 얼마나 컸나. 이게 단순히 자신이 '돈을 가져서' 되는 것만도 아닐 거다. '이럴 때 돈을 좀 드려서 마음을 표시하자'라는 생각을 동시에 해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나는 .. 내 (가상의) 남편이 이럴 때 이정도의 돈을 내놓을 사람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렇다면 '좋은 사람'이란 무얼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만약 내가 지금 결혼을 하려 한다면, 그 남자는 나랑 어떤 부분에서 성향이 비슷할 것이고,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일 것이며, 공감 능력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말을 예쁘고 다정하게 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사랑할 자신이 없으니까. 내게는 그런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 부모님이 수술을 하시거나 편찮으실 때 돈을 한 푼도 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우리 부모님이나 내 형제 자매에게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좋은 사람이라고 그를 생각하게 될까? 그때만큼은 평소에 나한테 얼마나 다정했느냐보다, 이럴 때 어떻게 행동했느냐로 판단되지 않을까? 


그간 내 연애경험을 돌이켜보면, 나는 나보다 돈을 많이 버는 남자를 만난 경험이 거의 없다. 내 연봉이 내 또래의 다른 여자들보다 결코 더 많은 것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직장에서 어찌보면 낮은 연봉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귄 남자들은 대부분이 나보다 돈을 더 적게 버는 사람들이었다. 나한테는 그게 정말이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데이트비용을 내가 절반을 내거나 혹은 그 이상을 냈지만, 그들이 내게 고급스런 선물을 하지는 않았지만, 정말로 나는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돈이 있으니까, 내가 쓰면 되는 거였다. 내가 내 화장품을 사고, 내가 데이트할 때 맛있는 걸 먹는 비용을 내고, 호텔비를 내고, 내가 나 갖고 싶은 걸 사면 되는 거니까, 남자들이 나보다 돈을 못 버는 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걸 모르면서 사귄 것도 아니었다. 응, 얘는 돈을 적게벌지, 하고, 그게 다였다. 아마 이건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물론 돈 많은 남자를 만난다면 좋겠지만, 그것이 내게는 필수조건이 아니다. 나는 내가 돈을 벌고 있고, 앞으로도 내가 돈을 벌 예정이므로, 남자가 얼마 벌든 별로 상관이 없다. 내가 이런 조건을 가진 사람인 이상, 나는 아마 앞으로 연애를 하게 된다고 해도 돈 많이 버는 남자를 만나기는 힘들 것 같다. 아니, 왜 다정하고 말도 잘 통하는 남자들은 돈을 잘 못버는 거지?? 어쨌든, 그러므로, 내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나의 남편이 이럴 때 제부보다 돈을 더 적게 내거나 아예 안낼것 같은 거다. 그건 돈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이럴 때 '돈을 드리자' 라는 생각을 못해서일 수도 있다. 제부는 수시로 우리 집에 먹을 걸 보내고, 우리 부모님이나 내가 하는 말들을 허투루 듣지 않고 우리의 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해 자기 돈을 쓰기를 아끼지 않는다. 나는 이 사람의 장점을 이렇게나 잘 알고 있지만, 내게는 '다정하게 말하는 사람', '공감 능력 있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더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에 이 사람을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에 끼워두질 않았더랬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 제부가 큰 돈을 주고 내 남편이 아예 돈을 안준다면... 더 좋은 사람, 더 생각이 깊은 사람은 제부가 되지 않을까? 내 남편이 평소에 나를 따듯하게 대해주고 웃게 해준다고 해서 '그정도면 더 바랄 게 없지'가 되는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내 남편이 제부만큼 우리 집에 잘할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내가 제부를 좋아하고 싫어하고와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인데, 진짜 내가 누구랑 결혼해도 우리 제부만큼은 못할 것 같은 거다. 내 남편이 아무리 나한테 잘하는 사람이고 나랑 다정하게 알콩달콩하게 살아도, 우리 집에 잘할 것 같진 않은 거다. 음.. 다른 가족 구성원들이 보기에는 내 남편이 딱히 좋은 사람은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러자, 벼락 같은 깨달음!


내가 돈을 드리면 되지! 우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냥 내가 내놓으면 되지, 뭘 그걸 남편에게 바라나. 제부가 돈을 드렸으니 여동생이 안드리잖아? 만약 내가 결혼했고 부모님과 떨어져 산다면, 그런데 이런 상황이 온다면 나는 '내 남편이 돈을 드릴까? 드린다면 얼마나 드릴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내가 돈을 드리자!! 하는 생각이 든거다. 역시! 어떤 상황에 있어서 고민해보고 해결방법까지 내놓는 거는 내가 진짜 잘해. 내가 하면 되잖아? 어차피 나는 계속 돈을 벌 생각이고(직장을 여길 계속 다니는지와는 별개로), 그렇다면, 굳이 남편이 이렇게 해줬으면...하는 생각 같은 거, 할 필요 없잖아? 내가 하면 되는거지. 우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역시 지혜로워, 쿨해, 멋져!! 뭐든 그냥 다 '내가 하면 되지'라고 생각하는 거, 진짜 멋진 자세인 것 같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음..역시 나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걱정하는 건 천재적이군..... 비연애중이면서 가상의 남편을 설정하다니......... 상상력이 넘나 풍부한 것...................................... 음.......................................


그나저나, 돈은 정말 무서운 것이구나...순식간에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끌어올리거나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끌어내리다니..아니, 그건 그 사람의 문제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는 나의 문제이겠지만.

돈이면 다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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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