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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2. 18:01

사흘 뒤

제목 없음


안녕, 에미. 당신도 방금 창밖 내다봤어요? 유령이라도 나올 것 같지 않아요? 우박폭풍이 몰아치는 걸 보면 꼭 지구 종말을 알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늘에 이상한 황갈색 막이 드리우더니 난데없이 거기에 시커먼 커튼이 펼쳐지고, 곧이어 수천수만 개의 하얀 자갈이 어마엉마한 속도로 쏟아지는군요. 그 영화 제목이 뭐였더라? 거북인지 개구린지 닭인지가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영화 있잖아요. 혹시 알아요? 잘 있어요. 레오. (p.213)



개구리가 내리는 영화는 매그놀리아, 라고 그가 불쑥 말했고 새벽 세시를 안주삼아 잭콕을 마시고 있던 그인지라 새벽 세시에 그 얘기가 나오는가보구나 했는데 나로서는 전혀 기억나질 않았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와, 낯선 곳 낯선 상황에 두려웠던 마음을 달래며 그런데 그게 새벽 세시에 나오는 구절이더냐, 했더니 그렇다고 했다. 나는 현재 책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읽어달라 했고, 그 새벽, 전화기 너머에서 그는 이 구절을 읽어주었다.


아, 이런 문장이 있었네, 레오가 이랬네, 하던 것보다 더 먼저 

아, 참 좋구나, 했다.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책을 읽어주는 것, 말이다.

낯선 두려움 속에 떨다 집으로 돌아와 내 방 내 침대에서 포근하게 이불을 덮고 좋아하는 사람이 읽어주는 책을 가만히 듣고 있는 새벽. 심지어 그 책은 내가 좋아하는 책. 이 모든게 너무 좋아서 히죽히죽 웃음이 나왔다. 행복하다고도 생각했다.


조금만 더 읽어줘요 라고 했던가, 그 다음도 읽어줘요 라고 했던가. 나는 이 상황과 이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터. 그는 계속 읽어준다.


1시간 30분 뒤

Re:


동물농장. 개구리 왕.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레오, 사흘 동안이나 아무 소식도 없다가 기껏 이런 생뚱맞은 동물 애니메이션 이메일로 저를 어이없이 만들어야겠어요? 다른 수신자를 찾아 보시죠. 저는 거의 반 년 동안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당신에게 성실하지 못했어요. 당신과 날마다 많은 시간을 여기서 보내지 못했죠. 그 결과 우리가 급기야 폭우나 하늘은 덮은 황갈색 막에 대해 얘기하게 되기에 이르렀군요. 저에게 당신 얘길 하고 싶으면 하세요. 저에 대해 알고 싶은 게 있거든 물으시구요. 하지만 여기서 날시 얘기를 하는 건 어울리지 않아요. 당신 눈에 갑자기 우박만 보이도록 미아가 당신 고개를 돌려놓았나요?

미아 얘기 나온 김에 몇 가지 더 물을게요. 혹시 미아더러 당신과의 만남에 대해 아무 얘기도 말라고 하셨어요? 사춘기 아이들처럼 자기들끼리만 대단한 비밀이라도 있는 양 쉬쉬 하다니, 대체 이 무슨 유치한 장난인가요? 레오, 솔직히 말하면 당신과 더 얘기할 마음이 없어졌어요. 안녕히 계세요. 에미. (p.214)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저자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08-04-1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사랑이 이메일을 타고 오다! 매혹적이고 재치 있는 독일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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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엔, 내가 그에게 읽어준다. 새벽 세시를 읽어주고 싶었지만 내가 현재 가지고 있지 않았고, 나는 어떤 책을 읽어줄까, 하고 생각하다 전화기를 들고 가 내가 좋아하는 책들만 가지런히 꽂힌 책장 앞으로 간다. 줌파 라히리와 올리브 키터리지가 보인다. 그것들 중 한 권을 꺼내려다가(지옥-천국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떡- 하니 자리한, 사랑의 미래를 꺼내든다. 아, 이렇게 맞춤한 책이.



그가 선물한 책이다.




그는 그녀를 2인층으로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은 그와 그녀가 은밀한 2인 공동체를 결성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나'와 '너'만의 성채 속에서, 두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채, 완전한 소통을 이루었던 것이다. 둘만의 작은 공간에서 깊게 흔들리는 눈을 들여다보고 '너'라는 이름을 부르거나, 한 사람만을 위한 은밀한 언어들을 메일로 보낼 때, 그들은 완벽하게 세상과는 절연된 2인의 왕국을 만들어낸 것 같았다.


어느 환한 봄날의 꽃그늘 아래서, 그가 지상에서 가장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을 때, 다만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그 시간은 완벽했다. 그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시간은 모든 모욕을 잊어버리고 조용히 닫혔다. '너'를 부르는 것 자체가 이미 어떤 간절한 전언을 머금고 있었다.


2인칭은 주술의 호명이다. 한 사람이 누군가를 2인칭으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은, 당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 '당신' '그대'라고 호명할 때, 2인칭은 언제나 지금 현전하는 것을 대상으로 한다. '내'가 부를 때, '당신'은 내 눈앞에 있어야만 한다. 혹은 '내' 목소리를 당신이 들을 수 있어야 한다. 2인칭은 1인칭이 만들어낸 간절한 대상이다. 1인칭이 2인칭을 부르는 그 순간, '나'는 '너'로 인해 '내'가 된다. 2인칭 당신이 있기 때문에 1인칭은 2인칭을 그리워하거나, 간절히 바라거나, 혹은 원망하거나 증오할 수 있다. 2인칭은 매혹적이고 불길한 호명이다. (p.42)



읽어놓고 웃었다. 어색하고 간지러워서.


한꼭지 더. 

어디가 좋을까 뒤적이다가 찾아낸다.

 

 

그녀를 기다리는 차 안에서 그는 백미러 속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그 기다리믄 모호한 행복과 날것의 불안을 뒤섞었다. 기다리는 순간만큼 순수하게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시간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기다리는 순간은 그 사람에 대해 간절하고 비장해진다. 백미러 속으로 모르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어느 순간 그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 사람은 그의 기다림에 대해 유일하고 절대적인 사람인 것 같다.

 

그러나 기다림은 하나의 착란이다. 기다림의 착란은 그가 기다리는 미래라는 것이 하나의 환상이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환상에 볼모로 잡혀 있는 그의 현재를 말해주었다. 그녀에게 더 이상 기다림의 말을 하지 않게 되고, 그들 사이에 어떤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이제 자신의 기다림의 자세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그는 그녀를 기다리던 장소를 습관처럼 지나다가 백미러를 들여다보았다. 11월의 찬비가 내리는 거리에서, 기다림이란 이미 착란적인 습관이었다. 그녀가 나타날 이유는 없었지만, 어떤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가 기다리는 것이 그녀가 아니어도 좋았다. 어쩌면 그의 욕망은 그녀라는 대상이 아니라 기다림 자체에 머물렀는지도 몰랐다.

 

가장 지독한 기다림은 기다림의 기척을 내지 않는 것.

기다린다는 것을 절대로 알리지 않는 기다림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불가능한 것에 대한 가장 순수한 기다림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다리지 않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p.123-124)

 

 

 

우리는 기다림에 관한 예의, 그 농담을 시작한다. 깔깔대고 웃다가, 다른 꼭지를 더 읽는다.

이 부분을 읽기 전에는 아주 많이 뜸을 들였다. 후- 후- 심호흡을 자꾸 했다. 가장 아름답게 생을 탕진하는 장면이었다, 라는 문장이 눈에 밟혔다. 나는 아름답게 생을 탕진하는 중이로구나, 했다. 어느 부분에서 내가 그토록 떨렸던건지.

 

 

사랑은 무거운 생을 송두리째 들어 올리는 축제의 시간을 만나는 것이다. 상투적이고 지리멸렬한 시간으로부터 전속력으로 도주하는 에너지 같은 것. 세상의 모든 축제는 일시적이고, 얼마간의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축제는 그 안에 방탕과 폭력을 포함하고 있으며, 때로 그것은 죽음과 맞먹는 삶의 폭발적인 낭비를 의미한다.

 

그들에게 구체적인 미래가 보장된 것은 아니었으나, 이국의 땅으로 함께 여행하는 상상은 로맨틱한 것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떠들썩한 축제가 열리는 낯선 땅에서 이방의 리듬에 맞추어 손을 잡고 축제의 행렬을 따라가거나, 그 행렬이 지나는 호텔의 2층 창에서 다른 별의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내려다보고 싶었다. 영원히 취기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술을 마시며 서로의 상기된 눈빛을 어루만지고 싶었다.

 

그 순간, 어떤 미래의 약속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가장 아름답게 생을 탕진하는 장면이었다. (p.107)

 

 


사랑의 미래

저자
이광호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11-10-11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한 편의 시처럼, 소설처럼 다가오는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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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하지 않았던 그의 말이 가슴에 오래 남는다.

당신을 처음 알게됐던 칠년전에는 우리가 이렇게 서로에게 책을 읽어주게 될 줄은 몰랐는데, 했던 말.

그는 가끔 자신도 모르게 그냥 던지는 말이 내게 아주 오래 남는다는 것을 알까.

오래전 겨울에, 이빨 교정했냐고 물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동동주를 앞에 두고 당신은 술취하면 예뻐지네, 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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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
2014. 9. 4. 13:10

sabine 를 그간 '사비네' 라고 읽어왔는데 혹시나 싶어 사전을 찾아보니 발음기호가 이렇다.


[séibain]


아..그간 나는 어떻게 살아온 것인가. 사비네이든 세이바인이든..여튼.

이사한 기념으로 남동생 사진 하나 투척.




어제 보내준 셀카인데 핸드폰 바탕화면으로 지정해 놓으란다. 하하하하하. 

나는 맥주 마시고 있었는데 녀석은 운동하다 셀카보냈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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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