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 13. 10:16

고등학생이었을 때였나. 나는 혼자 등교하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알았다. 항상 동네 친구 누군가와 함께 등교를 했는데, 나랑 같이 다니는 친구들은 항상 나를 기다리게 했다. 나는 더 빨리 학교에 갈 수 있었음에도 내가 준비를 다 마치고 친구네 집에 가면 그들은 항상 나를 기다리게 한거다. 의도치 않게 친구들은 '쟤는 저렇게 빨리 준비하고 오는데 너는 왜 맨날 늦냐'는 꾸중을 듣고 했더랬다. 의도치 않게 친구를 혼나게 한 적은 등교 말고도 있었는데, 그러니까 국민학생 때, 집에 있던 책을 다 읽은 나는, 옆집 친구네 집에 가서 매일 책을 빌려 읽었다. 나도 빌려줄 테니까 너도 빌려줘, 하고는 서로 얘기하고 빌려 읽었는데, 나는 하루에 친구 책을 두 세권씩 빌려 읽었던 반면, 친구는 내가 빌려가라고 해도 한 권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었다. 이걸 친구 어머님은 다 보고 계셨던 건지, 어느날 친구에게 '너 읽으라고 사준 책을 왜 옆집 애가 다 읽냐!'고 뭐라 하셨던 거였다. 그 말을 친구로부터 듣고, 으윽, 빌려읽지 말아야 하는건가, 어린 마음에도 생각했지만, 그래도 다 빌려 읽어서 옆집 아이네 집  책 백 권도 내가 다 읽었다. 나는 친구를 혼나게 하려는 게 아니었지만, 친구는 나 때문에 혼났다.


아, 이 얘기 하려던 게 아니고, 그러니까 중고등학교때 친구랑 등하교를 항상 같이하면서, 그냥 그래야 되는 건줄 알았다. 친구 없는 아이로 보이기 싫었던 것 같고, 혼자 다니는 걸 보이면 안되는 줄 알았던 것 같다. 그건 뭔가 부끄러운 거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늘 주변에 사람이 많았는데도 가장 친한 누군가, 등하교 같이할 누군가가 없으면 불쌍해보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1학년 말부터였나, 혼자 등교하기 시작했는데, 와-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혼자 다니는 게 이렇게나 편하다는 걸. 세상 편해...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내가 하고 싶은 생각을 하면서 걷는다는 게 진짜 너무 좋은거다. 결국 어떻게 되었냐면, 학교 가다가 같은 반 아이 만나서 함께 걷는 게 짜증이 날 정도였어. 아무도 만나지마라...가 나의 바람이었지. 그때부터 나는 혼자인 걸 너무 편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결국 대학 때는 아웃사이더였지...라고 나는 말하지만 남동생은 나를 왕따라고 부른다. 누나한테나 아웃사이더지 밖에서 보면 왕따지...


뭐, 아무려나..



어제 B 와 긴 통화를 끝내고 생각이 많아졌다. 나란 사람에게 '가장 친한 친구'란 누구인걸까. 그러고보면 나는 언젠가부터 가장 친한 친구의 이름을 댈 수 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어릴 적에는 그게 당연히 있었던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라져버렸달까. 지금 물론 가끔 혹은 자주 만나며 좋은 감정을 갖고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은 많지만, 누가 나에게 '너가 가장 친한 사람은 누구야?' 라고 물어서 내가 그들중 누군가의 이름을 대면, 그 상대도 내이름을 댈까? 는 정말 아닌 것 같은 거다. 그러고보니 나는 '단 하나의 절친' 같은 게 없는 게 아닌가 싶은 거다. 내가 지금 만나서 관계를 유지하는 친구들 모두 좋고, 또 좋으니까 관계 유지가 가능한건데, 그런데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댈 수 있는 '절친' 혹은 '베프'의 개념인가 하면, 아닌것 같은 거다. 나는 그들중 누군가에게도 가장 먼저 생각나는 친구가 아닐 것 같은 거다. 그러면,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서운하거나 외롭거나 한가? 라고 물으면 또 그건 아닌 거다. 나는 그대로 좋은 거다. 지금처럼 이런 관계, 지금처럼 이런 감정으로 지내는 것이 내게는 퍽 만족스러운 거다.


나는 정착하지 못하는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을 그래서 했다. 친구로 쳐도 누군가 딱 한 명, 단 한 명에게 고정된 게 아닌것처럼, 애인에게도 마찬가지. 연애중일 때도 나는 당시의 애인을 '가장 좋은 단 하나의 유일한 사람' 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다. 나는 항상 다른 사람, 다른 관계, 다른 것에도 시선을 돌리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연애가 짧게 끝나는 건 아마도 그런 내 성향 탓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안주하지 못하는 사람인것 같달까. 정착할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던 사람인 것 같다. 나는 내 가족에 대한 강한 애정이 있고, 내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고, 나와 내 가족들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성실히 일하는 것. 이것 말고는 사실 더 바라는 것도 없었던 것 같고. 내가 가진 관계들에 대해서라면 또 그대로 흡족하였으므로 뭔가 더 바라는 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관계에 있어서 결핍이 없었던 것 같고, 그건 지금도 그렇다. 나에게 무언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 삶이 외롭다거나 심심하다거나 하지도 않다. 나는 혼자 뭘 해도 너무 신나고 재미있고 또 혼자 뭔가를 할 계획을 세우면서도 신나는 사람이라서, 누군가에게 심적으로 정착한다는 것이 내 인생의 어느 시점에도 없었던 것 같은 거다. 


그런데 어제 B 와 통화를 끝내고서는, 만약 누가 '너 누구랑 제일 친해?' 라고 물어보면 이 사람의 이름을 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B 도 현재라면, 누가 물었을 때 나를 가장 제일 친한사람에 넣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존재에 대한 안정감이 느껴졌다. 아마, 이걸 느꼈었는데 헤어졌었기 때문에 헤어져있는 시간 동안에 그렇게 폭풍울음을 울었던 거겠지만... 어제는 전화를 끊고, 심적으로 이 사람에게 정착해있는 건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더랬다. 이건 뭐지? 하고. 


어제는 그렇게 저녁에 친구, 정착 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했다.




완전히 다른 얘긴데,

지난 해에 있었던 어떤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가 자꾸 툭툭 튀어나와서.



내게는 자신을 양성애자라 말하는 친구가 있고 또 동성애자라 말하는 친구도 있다. 성적 소수자라는 것에 대해 당당히 커밍아웃 할 수 있는 친구들인데, 어느날 여러명이 만나서 놀던중, 내가 일전에도 일기에 쓴 적 있던 '음식점의 키 큰 근육질 남자와 부딪치고 그 단단함에 잠깐 홀렸었던' 경험을 말했더랬다. 그때 여자랑 사귀고 있던 여자1이 나에게 '너 그거 고정관념이다, 남자의 단단한 근육이 좋다는 거 고정관념이야, 여자가 얼마나 부드러운 지 알아?' 라고 말하는 거다. 나는 '당연히 여자 부드럽지, 남자도 부드러운 남자 있고, 그런데 난 그런 단단함에 홀려' 라고 했더니, '그것도 만들어진 거고 여자 부드러운 거 못따라간다, 그게 훨씬 좋다'고 반복해 말하는 거다. 그 뒤로 더 얘기하진 않았지만 이 일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이때도 뭔가 또렷하지 않은, 좋지 않은 기분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더 명징해지는 느낌이랄까. 나는 이성애자이고, 이성애자가 기득권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친구에게 어떤 말을 할 때 조심스러워진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말로 이미 지적을 받았던 적도 있었더랬다. '너 그거 동성애자 혐오야' 라고. 아, 그런가? 하고 고개를 끄덕였던 적도 있던 터라, 혹여라도 내가 어떤 실수를 하게 될까봐 더이상 말은 하지 않았었는데, 그때 되게 기분이 묘했던 거다. 그리고 그 후에 계속 이 일을 생각해봤다. 어쩌면 나는 여전히 계속 차별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차별하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할 말을 하지 않았던 것 역시 차별인 거잖아. 그러니까 만약 그 친구가 내게 했던 그대로 똑같이 돌려서 그 친구에게 말했다면,


"야, 단단한 남자 근육이 얼마나 좋은 줄 아냐, 여자의 부드러움 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지, 니가 단단한 남자를 안만나봐서 그런가본데, 니가 몰라서 그러는 거야" 라고 그 친구가 했던 걸 그대로 그 친구에게 돌려줬다면, 나는 폭력적인 게 아닐까? 만약 그 자리에서 내가 그렇게 말했다면 동성애자 친구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지 않았을까? 왜 이성애를 '못해서' 그걸 '모르는' 사람을 만들고 니 경험이 '더 낫다'고 말하는 거냐며 '폭력이다' 라는 비난을 받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 친구가 내게 한 것도 마찬가지 아닌가. 여자를 '모르니까' 너는 남자를 좋다고 말하는 건데, '여자가 짱이다, 니가 고정관념에 쌓여있다' 라고 하는 건, 내게도 마찬가지로 폭력적인 말이 아닌가. 그때 내가 '내가 남자 좋아하는 걸 왜 비난하냐'고 말하지 않았던 것, 그 말이 입밖까지 나오려다가 멈칫했던 건, 상대가 성적 '소수자'임을 인지해서인건데, 그렇다면 그 인지 자체가, 그래서 할 말을 참은 것 자체가, 나는 차별을 행한 게 아닌가.. 이 생각을 계속 한다. 내가 그자리에서 '너 그거 나한테 폭력적이야'라고 말했다면, 그러면 어떻게 됐을까?


사람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고 나 역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내가 이러다가 어느 순간 동성애를 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가 지금 이성애자이고, 한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 단단한 근육-전완근!-에 매혹되는 것이, 사회가 이성애를 옳은 것으로 그간 규정지었기 때문인걸까? 그 친구는 내 성적욕망이나 취향을 '부족한 것'으로 본 게 아닌가? 


나는 앞으로도 그 친구에게 이 얘기를 하게 될 것 같진 않다. 그렇지만, 이 얘기를 하지 않음과 동시에 다른 많은, 남자들에 대해 느끼는 나의 욕망이나 감정들에 대해서도 더 얘기하게 될 것 같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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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