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3. 16. 11:25

비서들의 점심시간은 교대로 이루어진다. 한 명이 열두 시에 나가고 한 명이 한 시에 나가는 것. 기존에 있던 직원과는 하루하루 번갈아서 오늘은 네가 열두 시 내가 한 시, 내일은 내가 열두 시 네가 한 시, 하는 식으로 했었는데, 새로운 직원이 들어오고 나서는 그 직원을 무조건 열두 시에 나가게 했다. 열두 시 팀이 다른 부서 직원들과 우르르 같이 가기 때문인데, 새로운 직원이 딱히 다른 친한 직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직원들과 친해져야 할 것 같아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막내가 돌아오면 내가 다른부서의 e 양과 함께 식사를 2차로 나간다.


보쓰는 항상 열두시 반에 식사를 가고, 한시 무렵이면 식사를 끝내고 돌아온다. 멀리 따로 약속이 있는거면 그렇지 않은데, 늘상 임원들과 주변에서 식사를 하곤 해서, 겁나 빨리 먹고 들어오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밥 빨리 먹는 사람이 정말 싫다. 끔찍하게 싫다. 여튼, 그런데 얼마전에 한 번은, 도대체 어디서 뭘 먹은건지, 한 시도 안되서 들어온 거다. 헐. 열두시 반에 나갔는데 한 시도 안되서 들어오다니...너무한거 아닌가? 그런참에 막내는 아직 들어오기 전이라, 보쓰가 나갈때도 들어올 때도 내가 있었던 거다. 그리고 보쓰가 양치를 하러 간 사이 막내가 돌아왔다. 새로 오픈한 식당에 갔더니 음식이 너무 늦게 나와서 늦었다고 했다. 그나마 나 배고플까봐 먼저 온 거라고. 그래서 괜찮다고 하고 나갈 준비를 하는데 보쓰가 양치를 마치고 들어와서는 막내에게 뭐라고 하는 거다. 


너 앞으로 열두시 사십분까지 사무실 들어와. 다음 사람 배고프게 뭐하는 거야.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지.



헐. 이게 뭐야. 어쩔. 그래서 나는 일단 막내에게 나는 네가 나를 신경써서 들어온다는 거 안다, 그러니 걱정말아라, 저 분이 오늘 너무 일찍 오셔가지고 나도 당황했다. 안그래도 된다, 라고 말을 해놓고 밥을 먹으러 갔다. 그래도 계속 불편한 거라. 하는수없이 밥을 먹고 들어와 양치를 하고는 보쓰에게 보고할 게 있어 들어간 참에 말을 했다.


**씨 늘상 제 생각해서 빨리 들어오려고 노력하고요, 오늘은 음식점에서 음식이 늦게 나와서 그런 겁니다.



라고. 배려 하는 사람인데 배려하지 않는 사람으로 오해하는 게 너무 싫어서, 가급적 보쓰에게 업무 보고 외에 다른 말을 하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한 거다. 그러자 보쓰는 내 말을 들은건지 안들은건지, 앞으로 열두시 사십분까지 들어오게 하라고, 좀 일찍 나가서라도. 라는 거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들어왔는데 너 (안나가고) 보는 거 내가 불편해.


라고. 으응? 이건...뭐지? 지금...나 배고플까봐 이래? 혹시..보쓰는...츤데레???????????????????



암튼 이 일 때문에 나는 다른 부서로 가 점심 시간 십분만 앞당겨 달라 전무님께 요청했다. 막내가 좀 일찍 나가야겠다고. 그리고 이러한 일이 있었노라고. 그러자 전무님이 말씀하셨다. 니네 회장님은 너 되게 신경쓴다고. 음...




오늘. 주말동안 목소리가 바뀌어서 병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안그래도 아침에 보쓰한테 인사를 한 후 보고할 게 있어 들어가니 너 감기 걸렸냐? 하시는 거다. 나는 이게 감기인지 뭔지 몰라 그냥 뭐 네, 라고 했는데. 너 왜이렇게 감기가 걸려! 이러고 버럭하는 거다. 아니..내가 최근 몇년간 감기가 안걸리고, 회사에 감기 돌 때도 혼자 안걸리고 막 그랬었는데, 왜 나한테 이러남? 여튼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 나오려는데, 나가는 나를 부르더니 



하루에 열다섯번씩 손을 닦아. 감기는 다 손으로 전염 돼. 손을 깨끗이 닦아.



하는 게 아닌가. 읭? 이거슨..........츤데레??? 그러다 나와서 자리에 앉아 생각해보니, 음, 자기한테 감기가 옮을까봐 저러나 싶기도 하고. 그런데 지금 내 목소리가 아주 진짜 병맛 개섹시라(읭?) 듣기 힘들어서 그런가 싶다가..설마..나를 아끼는 마음에 저러나 싶은 것이..그의 정체는 츤데레?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암튼 나를 아끼는 거면 심히 미안하게 됐는데, 나는 당신을 아끼지 않소. 미안. 내가 안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것도 참 부담인데. 라고, 사실은 감기 옮을까봐 전전긍긍하는 노인네에 대해서 하염없는 착각을 하고 앉았는 것이다.



병원에 갔더니 과로한 것 같다며, 감기인가요? 물으니, 기관지염이죠, 란다. 제기랄. 기관지염이라니. 어떻게 나한테 이런 게? 아침에 가래도 나와서 헐, 이런 일이..하며 엄마, 나는 담배도 안피는데 가래가 나왔어? 하니까 엄마가 말했다.


담배를 피나보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처구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금 보쓰가 줄기차게 재채기를 하고 있어서, 씨발, 이제 진짜 내 탓하겠군, 하는 생각이 들고 있다. 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츤데레는 개뿔. 감기 옮을까봐 그런건데 감기 옮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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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