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6. 12. 11:14

'엘리자베스 게이지'의 [스타킹 훔쳐보기] 시리즈 중에 여자가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남자와 결혼해 사는 장면이 나온다. 여자는 나름의 상처가 있었고(누구나 그렇겠지만), 이 나이든 남자와 안정적이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한다. 여자는 남자가 자신보다 나이가 훌쩍 많다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데 반해, 남자쪽에서는 그게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자신의 늙음이 여자에게 혹여라도 어떤 불편을 줄까 늘 걱정돼서, 그렇지 않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여자로서는 그런 남자를 보는게 안타까워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라고 생각하며 조심스레 '테니스 이렇게 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만 남자는 '얼마든지 더 칠 수 있다구!' 하게 되는 것이다.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척...하려고 하는 것이다. 내 체력이 약하지 않아, 나도 네 또래 젊은 남자들처럼 얼마든지 체력이 돼!



며칠전에 처음, 새치를 발견했다.


라고 쓰면서 울컥 한다.


새치라는 것은 나와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라고 생각했다. 관심도 개념도 없었다. 주변에서 새치가 있다는 사람들이 있어도 그러든가 말든가, 나는 아니야, 하고 무심했던 거다. 엄마의 새치를 집에서 내가 몇 번 염색해주었는데, 엄마는 내게 엄마니까 새치가 있는게 당연했다. 아빠도 할머니도 새치가 있는 게 당연했고, 내 친구들이 새치 얘기를 할 때도 그 친구들은 그런가보다 하고 말았다. 나는 젊고, 빛나는 갈색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 이런 내게 새치가 있을 리 없다, 그런것은 한 이십년 뒤쯤에나 찾아오는 것, 하고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다. 그런 내가, 새치를!!, 내 머리에서 내가 직접 발견하고!! 뽑았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 충격은 내게 대단한 것이었다.


뽑고 나서 그걸 들고 온 방안을 휘저으며, 이거봐 나 어떡해 흰머리야 흰머리!! 하고 곧 울 것 같은 말투로 돌아다녔다. 식구들에게 들어보였다. 이거봐, 내가 내 머리에서 뽑았어! 나는 진짜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건, 실수야, 이럴 리가 없어. 어쩌다 생긴 실수 같은 걸거야!! 그러자 남동생은 '내가 며칠전에 누나 흰머리 있다고 했는데 무시했잖아' 란다. 맞다. 이 흰머리를 뽑기 전에 남동생이 누나 흰머리 있는데? 했었는데 내가 그걸 웃기지마! 하며 무시했었다. 이, 내가, 무슨 흰머리냐. 말도 안되는. 빛에 반사되어 그렇게 보였겠지, 흥. 했었는데, 진짜 흰머리가... 아빠는 '누구나 나는거다' 라고 하셨고 엄마는...엄마는.....



야, 니 나이가 새치 날 나이지. 나이 그렇게 됐잖아.



하셨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 너무 충격 ㅠㅠㅠㅠㅠㅠㅠㅠ대충격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너무 슬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래서 친구들에게 이 슬픔을 토로했다. 그러자 나보다 나이가 많은 친구도, 동갑인 친구도, 나보다 나이가 적은 친구들도, 모두다 하나같이 하는 말이 "너 이제 났냐?" 는 것이었다. 자기들은 진작에 새치가 있어서 이미 염색중이라는 거. 그러면서 '지금 새치가 생겼으면 엄청 늦게 생겼네' 가 그들이 내게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었다. 이것은 위로의 말이었지만, 내게는 위로가 안돼. 그 말은 내게 오지 않고 내가 받아들이는 자명한 사실은 



'내게는 새치가 있다' 는 것이었다. 



어쩌다 하나가 있는걸거야, 어쩌다 하나...그래..뭔가 실수일거야. 이건 뭔가 착오가 있는 거야. 어쩌면 흰색이 아니었는데 흰색으로 본 걸지도 몰라. 마침 햇빛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그렇지만 지지난주에 미숙이를 만나서 이 얘기를 나누다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머리를 들췄던 나는, 거기에서 또!! 새치를 봤다. 아. 눈물나 ㅠㅠㅠㅠㅠㅠㅠㅠ 울고싶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뒤로 틈만 나면 거울을 들여다보며 머리를 들어본다. 이렇게 저렇게 이쪽 저쪽...현재 두 개의 새치를 발견했다. 뽑으면 더 난다고 해서 뽑지 않고 있다. 염색을.. 나도 해야 하나? 이, 내가, 이런 고민을 하게 될줄이야... 아 조낸 슬프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는 게 아니라 슬픔이 영혼을 잠식한다. 새치..가 있다는 데서 오는 슬픔이 내 영혼을 온통 갉아먹고 있어...




새치를 발견한 후로 계속 슬퍼서, 내가 왜이렇게 슬픈가를 생각해보았다. 그러다 엘리자베스 게이지의 저 소설이 생각났다. 나는 혹시, 내 애인이 나보다 훌쩍, 젊기 때문에 슬픈가? 하는데 생각이 미쳤다. 만약 내 애인이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이미 흰머리를 가진 남자였다면, 그렇다면 나는 슬프지 않았을까? 자기보다 나이 많은 여자, 심지어 새치까지 생겨버린... 여자를 만나는 그의 마음은 뭘까...이러다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그렇다면 나는 시꺼먼 머리를 가진 젊은 여자에게로 그를 보내야 하나..하는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생각을 한 번 해보다가 ㅠㅠ 그냥 만나면 머리 들추지 말라고 할까, 하다가, 아니야, 머리를 들추거나 쓰다듬게 냅두고 대신 염색을 하자, 하다가, 염색은 두피에 나쁜데 ㅠㅠㅠ 하다가, 그러면 미장원에서 염색을 할까 하다가, 내가 가는 미장원에 전화해보니 기본 염색이 6만원이라고 해서 빡치고 안해!! 했다가, 친구로부터 혼자하는 염색약 추천받았는데 너무 저렴이라, 이런 저렴이를 내 머리에 처발라도 되나, 했다가, 그냥 자연스럽게 이대로 둘까, 했다가, 백발이 되어도 할 수 없지 않나, 했다가, 내가 젊은 애인을 가진 게 아니었어도 툭, 갑작스레 튀어나온 흰머리에 이토록 큰 슬픔과 불안을 느꼈을까, 다시 돌이켜보니, 



오!



나는 그랬을 것이다. 


나는 젊은 애인 때문에 흰머리가 슬픈 게 아니야. 

나는 그냥 '나의' 흰머리가 슬픈 거야. 나는 '나의' 새치가 슬픈 거야. 나는 내가 이토록 늙어가고 있음을 그대로 증명하는 게 싫은 거야. 이게 슬픈 거야 ㅠㅠ



일전에 b 에게 그렇게 물었던 적이 있다. 네가 만났던 여자들 중에서 내가 제일 나이가 많지 않아? 라고. 그의 과거 연인들의 나이차를 내가 물어 이미 알고 있었던 터다. 그러자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이렇게 말했었다.



그치. 나이 마흔인 여자는 네가 처음이지.



이봐!! 



하아. 나이 마흔(은 아직 아니지만..몇 개월 남았지만...)에 나는 새치가 있다. 슬픔이 쓰나미로 나를 덮쳐서 헤어나올 수가 없다. 이 슬픔이 너무 커서 b 에게 차마 말하지도 못했다. ㅠㅠ


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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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