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3. 26. 10:37

일전에 알라딘에 책에 대한 페이퍼로 길게 써 올렸다가 바로 다음날 지워서 읽지 못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 글의 요지는 나는 어릴때 여러차례 성추행을 당했었고, 여기에 대해서 무능한 아버지와 나 자신을 원망했었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능력이 있었다면(돈을 잘 벌어왔다면) 엄마까지 함께 일하러 나가지 않아도 됐을테고, 부모 중 어느 한쪽이라도 내 옆에서 나를 돌봐줬다면 내가 성추행에 노출되지 않았을 수 있었을 거라는 것. 나에 대한 것은 더 심하게 반항하지 않은데서 오는 '나는 음탕한 년' 이라는 원망이었다. 꽁꽁 싸매고 있을 때는 이것이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는 채로, 나만 원망하며 살다가, 나중에야 말문이 트이면서 이것이 내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버지에 대한 미움은 남아 있었다. 


이 일에 대해 얘기하면 내 말을 듣던 내 친구들은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줬고 그때마다 번번이 나는 울며 위로 받았다. 그러다 이 일을 B 에게 얘기했을 때, B 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너의 미움의 대상은 방향을 잘못 잡았다, 잘못을 행한 사람을 미워해야 하는데, 왜 아버지를 미워하냐' 했던 것. 이 말을 듣고 또 나는 주루룩 눈물을 흘렸었다. 그간 내 말을 들었던 사람들은 나를 위로하기에 전념을 다해 내 중심으로 얘기해줬다면, B 는 거기에 대상을 분명히 잡고자 하는 냉정함 이라고 해야 하나 이성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게 있었달까. 한번도 '네가 미워하는 대상이 잘못 되어 있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 B 의 말은 새로웠고, 또한 맞다고 수긍되어졌다. 그래서 여전히 나는 그렇게 말해준 B 에게 고맙고, B에게 그 말을 할 수 있었던 나 자신도 기특하게 여겨진다.


B 의 말이 맞다고 수긍하면서도 여전히 아버지에 대한 원망의 잔재는 남아 있었다. 내가 이 일을 알라딘에 글로 써 까발렸다해도, 내 감정이 속시원히 해결되지도 않았고, 오히려 이 일을 쓴 것에 대해 잘했다와 아직 드러낼 때가 아니다라는 감정이 심하게 충돌해 그 글을 올리고 끙끙 앓었더랬다. 결국 감췄지만. 어쨌든 내가 갑자기 이 일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요 며칠 과거의 어떤 일이 자꾸 생각나서다.


여동생이 중학생이었던 때, 여동생과 나는 두 살 차이이니, 나도 중학생이었는지 혹은 내가 고등학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여동생이 중학생 시절, 여동생은 전교에서 1등을 하는 모범생이었고 선생님들의 귀여움을 독차지 하고 있었다. 여름방학이었는데, 하루는 당직중인 국사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이가 좀 있는 남자선생님이었는데, 학교에 일이 있어서 도와줄 학생이 필요하다, 그러니 여동생이 학교에 와서 같이 일 좀 해줬으면 좋겠다, 했던 거다. 당시만 해도 선생님이 심부름 시키는 아이는 예쁨 받는 아이라는 생각이 있었고, 예쁨 받고 똑똑함을 인정받았으니 부르는거지 싶어 여동생은 알겠다고 가겠다고 했고, 엄마도 다녀오라 했더랬다. 나 역시도 별 생각이 없이, 아 쟤 학교에 일 도와주러 가는구나, 나는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하고 말았더랬다. 그런데 아빠가 말렸다. 버럭 화를 내시고는 거길 왜가냐, 방학인데 니가 왜 선생이 부른다고가냐, 선생이 너한테 뭔 짓을 할 줄 알고 가냐, 절대 안된다, 당장 못간다고 해라, 하고 아주 난리를 치신 거다. 그래서 엄마랑 나, 여동생까지 아빠의 기세에 눌려 여동생은 학교에 가지 못하고, 누가 전화했는지 모르겠지만 여동생의 국사선생님에게 전화 걸어 뭔가 거짓으로 사정을 대고 못간다고 했다. 아빠가 전화했나? 잘 모르겠다. 이 일이 그 당시에는 아빠도 참...하고 말았던 건데, 요즘에는 이 일이 아주 새롭게 여겨지는 거다. 만약 아빠가 그때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면?



선생님은 정말 일을 도와달라고 예뻐하는 모범생 제자를 불렀을 지도 모른다. 그런 순수한 의도와 목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똑같은 크기로, 전혀 다른 의도로 불렀을 지도 모른다. 만약 그때 여동생이 학교에 가고, 혹여 여동생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면? 나쁜 쪽을 생각하면 진짜 가슴이 후달리는 거다. 그러자 아빠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정의됐다. 아빠는, 알았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말렸을 거라는 걸. 아빠는, 우리를 위험에 노출시키지 않았을 거라는 걸. 아빠는, 무슨 수를 써서도, 우리에게 해를 입히는 일이 없도록 했을 사람이라는 걸. 아빠는, 지킬 수 있을만큼 우리를 지켰을 거라는 걸. 돈 벌러 나가야 했던, 엄마까지 돈 벌러 나가게 해야 했던 그 상황, 그 때 아빠는 '믿을 만한' 사람에게 우릴 맡겼고, 내가 그 일에 대해 언급했어도 그걸 받아들이기엔 무지했다는 걸, 거기까진 미처 차마, 라고 생각했었을 거라는 걸, 이제는 좀 알겠는 거다. 



그래서 여러가지 것들에 대해 고마워졌다. 냉정하게 미움의 대상이 잘못됐다고 말해준 B 에 대해서도, 그리고 오래전 그 일에 대해 떠오른 나의 기억에 대해서도. 이런 것들이 고맙다. 여전히 이 일에 대한 건 눈물나지만-언제까지 그래야할까?-, 이 일이 기억난 건 참 다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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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