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1. 21. 17:22

어제 퇴근길이었다. 지하철 안에서는 책을 보는 대신, 스맛폰으로 영화 [비커밍 제인]을 보았다. 아주 좋은 장면, 그래서 아주 감동을 받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8호선 잠실역이었다. 순간 까매졌다. 기억이.



잠실?

내가 왜 잠실에 있지?

8호선이면 집에 가는 건 맞네?

어디로부터 와서 집에 가는거지?

나는 집에 가기 위해서 오금에서 타는데?

오금은 5호선인데?

그러면 나는 퇴근길이 아닌건가?

그럼 지금은 낮인가?

밤인가?



무서웠다. 내가 있는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언제인지도 모르는게 정말 무서웠다. 등뒤로 식은땀이 흘렀고, 내가 집으로 가는건지 조차도 확실하지 않으니 이런 게 기억이 안나는 게 아닌가 싶어,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생각하자, 생각하자. 자, 나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생각하자, 생각하자. 


잠실에서 8호선을 탄거라면 나는 잠실에서 내린거고, 잠실에서 내렸다면 나는 2호선을 탄거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2호선을 탔냐. 라고 차곡차곡 물어나가다가 아, 지금은 퇴근을 했고, 퇴근길이며, 나는 양재역에서 역삼역까지 40-50분 사이를 걸어왔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역삼에서 탔어! 생각이 나니 이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했던 그 잠깐의 시간 동안 너무 무서웠다. 며칠전에도 이랬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와락 겁이 났다. 나..알츠하이머인가?



초조해졌다. 신경정신과에 가서 알츠하이머인지 아닌지 일단 진단을 받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번도 신경정신과에 가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처음 가게 생겼구나. 급한 마음에 오늘 회사에 와서 양재동 근처 신경정신과를 검색해서 예약했다. 오전 열한시반으로 예약해놓고서는, 아, 알츠하이머라고 하면 어떡하지, 이거 기억을 점점 심하게 잃어가면서 죽는 거 아닌가,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알츠하이머는 다른 병과는 달리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가족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하는 수 없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연락을 끊어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구나, 생각은 저 멀리로 자꾸만 치달았고, 그럴수록 무서워서 울고 싶어졌다. 그렇게 병원을 찾았는데 내 차례가 오기 전까지 얼마나 두근두근하던지.



닥터를 만나 선생님, 저 알츠하이머인것 같아 무서워요, 라고 증상을 말했다. 그리고는 알츠하이머 초기 증상일 수 있을까요? 라고 물었더니 그럴 수도 있죠, 라고 대답하셨다. 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닥터가 질문했다. 최근에 머리를 다친 적이 있냐, 업무 하다가 자꾸 놓쳐서 혼이 나진 않느냐, 스트레스를 받았느냐 등등. 대화 도중 닥터는 내가 알츠하이머라기 보다는 해리성 증상을 보인 것 같다고 했다. 아, 그러면 괜찮은거냐고 하면서 더 대화를 이어가다가 그때 내가 스맛폰으로 영화를 보고 있었다는 얘기를 했고, 집중을 잘하는 편이라는 얘기도 했다. 그러자 지난번에도 한 번 그랬다고 했죠, 그때도 영화를 봤어요? 묻길래 아뇨, 그때는 음악을 듣다가 그랬어요, 라고 했다. 그러자 지하철 안에서만 영화를 봤어요 아니면 걸으면서 계단을 내려오면서도 영화를 봤어요? 라고 묻길래 걸으면서도 봤죠. 그러자 책도 그렇게 읽진 않죠? 라고 하길래 책 읽을 때도 재미있으면 계단 올라가면서도 봐요, 라고 했다. 그냥 걷는 시간은 아깝잖아요, 라고. 그러자 닥터는


이건 해리성도 아니네요, 라고 했다.



책 보고 영화 보고 이러는데 멀티태스킹이 안되서 너무 거기에다만 에너지를 쏟는 거에요. 알츠하이머는 지금의 정 반대방향에 있습니다. 알츠하이머는 걸으면서 책보고 영화보고 이런 걸 하지를 못해요. 했던 사람도 못하게 되죠, 라고 했다. 아 그래요? 그래도 나는 걱정이 되서 그렇다면 저는 어떡하면 되나요? 라고 물었고, 닥터는 걸을 때는 걷기에만 집중하라고 했다. 지하철을 타서 내릴때까지만 영화든 책이든 보고, 걸으면서는 그런 것들을 보지 말라고 했다. 그러다 큰일나요, 그러지마요, 라면서.



그런데요, 만약에 알츠하이머라면, 초기라면, 치료가 가능한가요? 라고 묻자 닥터는 네, 치료 가능해요, 라고 했다. 아...약간 안심이 됐어. 



그래서 이제 걸으면서는 책이나 영화 따위 안보는 걸로....




이렇게 하고 사무실로 돌아오니 맥이 탁 풀리고 진이 빠진다. 아무것도 못하겠더라. 그렇게 벌써 다섯시 반이 되어서, 오늘 페이퍼 열정적으로 쓸 생각으로 회사 왔는데 한 글자도 못썼다. 


무서운 하루였고, 아, 씨양, 술 마시고 싶어졌다.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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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