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
이윤학
오리가 쑤시고 다니는 호수를 보고 있었지.
오리는 뭉툭한 부리로 호수를 쑤시고 있었지.
호수의 몸속 건더기를 집어삼키고 있었지.
나는 당신 마음을 쑤시고 있었지.
나는 당신 마음 위에 떠 있었지.
꼬리를 흔들며 갈퀴손으로
당신 마음을 긁어내고 있었지.
당신 마음이 너무 깊고 넓게 퍼져
나는 가보지 않은 데 더 많고
내 눈은 어두워 보지 못했지.
나는 마음 밖으로 나와 볼일을 보고
꼬리를 흔들며 뒤뚱거리며
당신 마음 위에 뜨곤 했었지.
나는 당신 마음 위에서 자지 못하고
수많은 갈대 사이에 있었지.
갈대가 흔드는 칼을 보았지.
칼이 꺾이는 걸 보았지.
내 날개는
당신을 떠나는 데만 사용되었지.
오래전에, 아무도 모르는 곳에, 이 시로 글을 써둔 게 있었다. 그리고 잊고 살았는데, 오늘 측근님의 블로그에서 이 시를 만나고, 어어, 내가 거기에 이거에 대해 써둔 게 있지, 하고는 오랜만에 들어가봤다. 나조차도 검색해 들어가야 하는 곳에. 가보니 2012년에 글을 써두었더라. 이 시로 글을 써둔 건 기억하지만 어떤 내용인지 기억 못했던 나는 처음부터 읽어봤는데, 긴 글이었고, 아,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거기서 또...
기록은 의미가 있구나.
이렇게 내가 어땠었는지, 내가 뭘 바랐었는지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알 수 있다니.
그때 간절히 바라던 것을 나는 이루었고, 그러므로 꽤 근사한 시간을 보냈었구나 했다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난 과거의 나 때문에, 그 간절한 바람 때문에 또 몹시 슬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