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2. 29. 12:43

여동생은 언젠가 내게 자신의 계획과 그 계획대로 살고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꽤 오래전의 얘기인데, 그당시에 여동생은 서른에 결혼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했어, 라고 했더랬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아, 뭐 이렇게 살 수도 있나? 했더랬다. 나로 말하자면 인생은 순간순간 무계획으로 살고 있다고 그때만 해도 생각했었으니까. 여동생의 말이 좀 충격이었던 것이, 당시 친근하게 지내던 남자사람후배 k 때문이기도 했는데,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발표를 하고난 후 합격했으며 또한 자신이 설계한대로 좋은 집안의 여자를 만나서 결혼해 아이까지 잘 낳고 사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인생은 계획대로 사는 것이구나, 하고 나는 놀랐었다. 정말이지 그때만해도 나는 내가 '무계획'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얼마전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를 보고난 뒤, 내가 어쩌면 내 계획대로 살고 있는 사람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영화가 그런 생각을 하게끔 도와줬다기 보다는 아주 작은 소재가 되어주었는데, 그 영화를 보면 스위스의 실스마리아란 지역이 계속해서 나오고 그 곳의 풍경은 정말이지 장관인거다. 영화 도중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줄리엣 비노쉬는 실스 마리아의 산을 오르고 또 아무도 없는 적막한 그곳의 해변을 가 옷을 벗고 풍덩- 뛰어드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을 보고 나는 언젠가 스위스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으며 동시에 이런 생각을 한 것이다.


다이어트를 열심히 해서 몸이 좀 내 생각대로 만들어지면 5월달쯤 부터는 수영을 배워야겠다, 고. 그리고 이 계획에 대해 여동생에게 얘기하면서 


'풍경 좋은 해변에서 남들 다 옷벗고 뛰어드는데 나는 수영을 못해 가만히 그들만 바라본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 속상한거야. 수영을 못하면 인생에서 즐길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놓치는 게 아닐까 싶더라고.'


라고 했다. 여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보니 나는,


2015년 2월에 괌에 가족들과 함께 할 비행기 티켓과 호텔을 예약해두었고, 7월의 제주도를 예약해두었고, 8월의 포르투갈을 예약해 두었다. 아직 오지도 않은 2015년에 대해 벌써 이렇게나 예약을 해두다니, 나란 인간은 계획형 인간인가 싶어진 거다. 물론 저것들중 일부는 변경되거나 취소될 수 있을 것이다. 전부가 그럴 수도 있고. 그러나 나는 '하기 위해' 예약해 둔 것이다. '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래서 내 인생을 여태 곱씹어보니, 나는 내가 계획한 대로 살고 있었고 또 내가 그리는 미래속 그대로 와있었다. 나는 내 인생 서른에 결혼을 하겠다 같은 계획을 세워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게 아닌 다른 계획들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계획들을 갖고 있었다.


언젠가 뉴욕에 갈 것이다

언젠가 책을 쓸 것이다

언젠가 연락처를 모르는 B 를 만나러 갈것이다


내가 굳이 '언젠가' 라고 설정한 이유는 내가 이 계획들로 인해 내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나는 스트레스에 굉장히 취약한 사람이고, 무언가 해야 한다는 압박이 들어오는 순간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되므로, 기간을 넓게 정해둔 것이다, 어쨌든 저것들을 모두 이뤘다. 비록 짧게지만 스물아홉에 뉴욕에 다녀왔고, 비록 소설은 아니지만 책도 나왔다. 그리고 연락처도 모르는 B 와 요즘은 매일 연락하고 살고 있다. 꿈이라고만 생각했던 일들을, 나는 다 해내고 있었다. 물론 이것이 내가 세워놓은 계획의 전부는 아니다.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계획들을 이루어 질 것이라고 지금은 믿는다. 사람은 어찌됐든 정말 하고 싶은 걸 위해서는 뭐든 액션을 취하기 마련이니까. 저 세 가지의 것들에 대해서 액션을 취한 주체는 '나'였다. 저 계획들이 '나의' 계획이었으니까. '파울로 코엘료'는 자신의 소설 《연금술사》에서 간절히 원하면 세상이 도와줄 것이다 라고 얘기했고, 나는 세상이 나를 도와줬는가 보다 라고 생각했었지만, 훗, 다 내가 했다. 내가 액션을 취한 거다. 


결국 나는 내가 계획형 인간임을 요즘에야 인정하고 있다. 다만 타이트하게 계획하지도 않고 시간을 정해두지 않는데, 그것 역시 내 계획의 일부인 것이다.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을 것'. 



토요일에는 여동생에게 말했다.


나 요즘 행복해.


여동생은 묻지도 않고 그저 손을 내밀어 내게 악수를 청했고, 나는 그 손을 마주잡아 흔들어 주었다. 그날 내가 던진 부정적 말에 긍정적인 답변으로 받아쳐준 것은, 오래 내게 남을 것이고, 주술이 될 것이다.



토요일에 안산으로 가던 도중 남동생은 내게 물었다.


누나 요즘 연애는 하고 사냐?


나는 응, 이라고 답했고 그러자 남동생이 다시 물었다.


혼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나또 빵터졌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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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