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 1. 16:11

나는 살면서 한 번도 비서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비서가 될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그러나 2009년 갑자기 비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엄마랑 얘기하다가 '엄마, 팔자에도 없는 비서를 하게 생겼네' 라고 했었는데, 그때 엄마가 내게 그랬더랬다.

 

니가 비서를 하게 됐다는 건 니 팔자에 있다는 거지.

 

아,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 역할이 내 팔자에 들어있었나 보구나, 라고 넘어갔더랬다. 그러면서도 이 일은 내가 하고 싶었던 일, 하게 될거라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이었기 때문에, 비서라는 직업에 대해 무시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이 일에 어떤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내가 가진 어떤 것도 이 비서라는 직업에 있어서 발휘될 수 없다고 생각했고, 또 비서라는 직업에 뭐가 필요한 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 일에서 내가 느끼는 성취감이라는 건 전무했다. 의미를 찾는 일 조차도 부질 없을 정도로 이 일은 그저 '밥벌이 수단'일 뿐이었다. 어쨌든 좋은 인상을 줘서 나를 이 자리로 데려가게 만들었으니, 그래, 해보자, 했던 거고 이 일로 내가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고 책을 사는 돈을 벌 수 있으니 크게 의미는 없지만 그냥 습관적으로 하는, 그런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도 물론 가끔은 욱- 하고 치밀었다. 스트레스야 어떤 일에서든 받을 수 있지만, 내가 말하는 욱- 이라는 건, 스트레스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이 일은 대체 어떤 의미가 있지? 이 일에 대체 어떤 능력이 필요하지? 그저 내 존재가 여기 앉아 있는 것만으로 돈을 벌면 되는 건가?

 

하는 생각들 말이다. 비서가 되기를 원하고 바라는 사람들에게 비서는 많은 능력과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 직업으로 생각되어질런지는 모르겠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냥 갑자기 이렇게 되어버렸고, 그래서 여기에는 어떤 능력도 필요 없다고 여겨졌다. 사실 내가 가진 능력이 아무것도 없다보니-스펙도 전무하고- 뭐 다른 데로 옮기겠다거나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지난주 금요일은 회식이었다. 꽤 비싼 소고기를 파는 음식점에서 회식을 했는데 보쓰와 임원 전체가 다 참석하는 회식이었고, 이 과정에서 음식점의 실수로 한 룸에 테이블을 모자라게 셋팅해버려서 결과적으로 가장 늦게 간 나와 막내비서 그리고 수행비서(대학생 아들을 둔 남자 기사님)는 보쓰와 따로 떨어진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임원들은 음식점을 향해 화를 냈고 우리가 그 자리에 앉는 걸 되게 미안해했지만, 우리 비서들은 너무 좋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어쩌다 이런 횡재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꺄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러면서 완전 신나가지고 전무님 고맙습니다, 막 이러고 인사하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좋다고 막 양대창 구우면서 소주도 시키고 맥주도 시키고 그랬다. 그 와중에 건배를 하다가 막내가 그런 말을 했다. 과장님이 안계셨으면 제가 버틸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고. 자기는 아마 그만뒀을 것 같다고. 그러자 수행비서분이 그러시는 거다. 맞다고. 이 과장이 진짜 고생이 많다고. 어디가서 자기가 늘 이과장 얘기를 한다고. 사람이 안된다고 하지 않고 된다고 한다고, 그리고 되게 만든다고.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진짜 별로 없는데 순발력도 대단하다고. 나는 한번도 이과장이 안된다고 말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는거다. 어떻게 그렇게 되게 만드는 지 모르겠다며.

 

아니..이게 무슨 말이야?????????????????????????????

 

나는 기사님이 나를 그렇게 보고 생각하실 거라고는 알지 못했으므로 놀랐다. 그러고보니 일전에 전무님께 업무상 내가 어떤 일에 대해 의견을 표했을 때, 옆에서 듣던 기사님이 '이과장 말이 들어보면 다 맞어' 라고 했던 기억이 있네. 내 빠이신듯? ㅋㅋㅋㅋ 어쨌든 나는 이 말을 듣고 놀랐고, 그리고 다시 생각하게 됐다.

 

나는 사실 내 일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고, 또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내가 있음으로 해서 누군가는 의지가 되고 도움이 되고 그러지 않나. 내 순발력이나 문제 해결 능력이 주변 사람들을 버티게 해주는 거라면, 이 일은 또 그런대로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또 이것은 그야말로 내 '능력' 이 아닌가. 이 일을 하면서 필요한 능력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니었나. 그렇다면 나는 제대로 된 능력을 갖추고 일에 임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거다. 사실은 나 비서가..적성인건가? 하는 생각까지 오버해서 나아갔다.

 

 

하긴 가끔 보쓰에게 결재를 올리거나 보고를 하고 나와서 내 스스로 나한테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긴 하다.

 

아- 나는 진짜 일을 조낸 잘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 진짜 일 조낸 잘하는 걸지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암튼 그렇게 얼굴 빨개지는 당사자앞 칭찬이 있은 후에 주거니받거니 술을 마시는데, 어느 순간 보니 내 옆에 경리과 부장님과 구매팀 차장님이 와서 앉아 계셨다. 모두들 내게 술을 주고 받고 했고 또 보쓰의 딸도 와서는 앉아 있었다. 한 번 내 옆자리로 오더니 다들 돌아갈 생각을 안해, 나는 갑자기 자뻑에 휩싸여서는 기사님께 말했다.

 

 

기사님, 사람들이 다 저 있는 데로 오고는 갈 생각을 안해요. 저 장사할까요?

 

 

그러자 기사님이 웃으시면서 맞다고 장사 해보라고 하셨다. 손님이 아주 그냥 대박 몰릴 것 같은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알라딘 ㅎ 님이 페이퍼에 올린 링크를 타고 들어가 2015 토정비결을 봤다.

 

http://www.shinhanlife.co.kr/pbe/a/PBEA601.jsp

 

 

이거 원래 다 좋게 나오는것 같긴 한데 여튼 나는 본업보다 다른 걸로 돈을 더 많이 번다고 돼있더라. 앗싸~ 도대체 뭘 어떻게 해서 돈을 많이 벌려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암튼 돈 많이 벌어가지고 고기도 더 먹고 술도 더 마시고 그래야겠다. 정말 돈을 더 많이 벌게 되면 추석때 어디 갈 비행기표를 또 끊어버려도 되고. 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이건 다른 말로 하면 사실 본업은 그다지 돈을 못 번다는 말이기도 하다. 연봉이 ..............................Orz

 

암튼 토정비결에 '연애를 해도 거기에 크게 휘둘리지 않고 일상을 산다'는 식의 표현이 있었는데, 그러고보면 며칠전에 ㄷ 님의 포스팅에 댓글 단 대로, 나는 연애에는 적합하지 않은 류의 인간인 것 같다. 연애를 좋아하고 남자도 좋아하고 뭐 그렇긴 한데, 연애에 최적화되어 있는 인간은 아니랄까. 뭐, 그렇다는 거다.

 

기사식당 가서 불고기에 소주 마시고 싶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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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