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보쓰가 없다. 해서, 막내를 쉬라 했다. 사무실에 나 혼자 있는 것. 물론 옆에 연구실도 있고 임원실도 있지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갔다 해야만 사람이 보이니 일단 비서실에는 나 혼자 있는 거다. 이렇게 간혹 혼자 있을 때면 사무실을 비워둘 수 없어, 혼자 배달 음식을 시켜먹곤 했었다. 아니면 샌드위치나 김밥을 사온다거나. 그런데 오늘은 도시락을 싸왔다. 우리집 밥의 질의 정말 너무 좋아서 식당 밥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데, 이왕 밥을 먹을 거라면 우리집껄로 먹자, 싶었던 것.
진미채볶음과 깻잎, 총각김치(달랑무)를 반찬으로 싸두고는 밥을 꾹꾹 눌러담은 도시락을 준비하고, 뭔가 육덕진걸 뭘 넣을까 생각하다가 아침에 부지런히 스팸과 파프리카를 넣은 계란을 준비했다. 계란을 깨서 막 저은 다음에 썰어둔 스팸과 파프리카를 넣고 또 막 젓고 올리브유 두른 프라이팬에 익혀낸 것. 내 도시락에 들어갈 사이즈만큼 잘라내 밥 위에 얹었다. 아웅 좋아. 나머지는 오늘 퇴근하실 아빠와 출근할 남동생 먹으라고 프라이팬에 두고 왔다. 착하다, 나. 여튼 이런 건강한 도시락을 손수 준비해 오니 너무 뿌듯하다. 아침에 출근해서 반찬을 냉장고에 넣어두기 위해 도시락을 꺼냈는데, 훗, 지금 먹고싶다!! 라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윽- 그러나 참아야지. 뼈로가는 칼슘두유 하나 마시고.
- 먼 곳에 있는 J 와 나는 서로 배틀붙은 것마냥 찌질함을 겨룬다. 찌질함, 너 어디까지 해봤니? 랄까. 내가 나는 이러이러하다, 라는 찌질함을 던지면, J 는 '나도나도!' 하고 받은 뒤에, '난 이러이러하다' 하고 다시 던진다. 그러면 나도 그것 받고 더, 더. 우리 둘다 지금 인생 최고의 사람을 만났다고 얘기하면서 서로의 이야기를 듣기를 즐기는데, 너무 좋아해서 두려운 마음까지도 J 의 것과 내것은 닮아있었다. 내가 출근해야 하는 아침시간이면, J 는 오후를 살고 있다. 나는 사무실에 오는 길이거나 사무실, J 는 까페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말을 걸고 서로의 감정에 귀기울여준다. 좋은게, 어제는 내가 '이러이러하다' 라고 말했더니 그런 나의 감정에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같다' 라고 하는거다. 바로, 그거다, 나는 그 책을 최근에 다시 읽었다, 라고 하며,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정말 짜릿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같은 친구는 너 하나면 된다, 고 나는 말했다. 너 만으로도 이런걸 나누기는 충만하다고.
- 어제는 전남친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화들짝 놀랐고, 읽지 않고 삭제했다. 어? 그러고보니, 내가 이사람의 번호를 핸드폰에 남겨두어야 할 이유가 뭐지, 싶어지더라. 삭제를 할까하다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아, '이 번호 차단'을 눌렀다.
- 어젯밤에 B와 나는 인터넷으로 뭔가 좀 찾아볼 일이 있었다. 서로 통화하며 스맛폰으로 찾아보다가 이내 답답해진 나는 노트북을 켰다. 바스락바스락거리는 소음이 그에게 전해진 터, 그는 뭘하느냐 물었고 나는 노트북을 켰다고 말했다. 노트북 위에는 내가 보다가 던져둔 책이며 시사인 같은 것들이 올려져 있었던 거다. 그것들을 치우고 놋북 뚜껑을 열고 켜고 하는 데서 발생한 소음이, 전화기 상으로 그에게 전달됐다. 그리고는 이건 어떨까, 이거 한 번 봐봐, 하며 서로 인터넷으로 찾은 걸 공유하고 대화를 하는데, 오늘 아침 돌이켜보니 이 시간이 막 너무 좋은 거다. 물론 내가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에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고, 그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에는 화면의 글자를 해독할 수 없었지만 -나는 왜이럴까-, 같은 걸 보고 같은 걸 찾는 게, 별거 아니지만 되게 좋은 거다. 출근하는 동안에는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둘이 보니까 다르네' 라는 뉘앙스의 말이었던 것 같은데, 이걸 내가 화면을 보면서 들어 바로 캐치하지 못했다. 이게 무슨 뜻인지 바로 물었어야 되는데, 아침에서야 그런 말을 들었다는 게 떠오르면서, '아, 그게 뭐였지? 무슨 뜻으로 왜 한 말이지?' 하는 생각이 든 것. 하아- 나도 멀티가 됐으면 좋겠다. 멀티가 안되니까 놓치는 게 많아. 어제의 일도 그렇고, 최근에 그와 많은 대화를 도란도란 나누면서,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생각이 났다. 리스베트가 한밤중에 미카엘을 보는 장면.
한밤중에 잠이 깬 그녀는 침대 위에 자기 혼자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더니 그가 열심히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손으로 턱을 받치고 그를 한동안 바라다보았다. 그는 행복해 보였다. 갑자기 그녀에게도 묘한 느낌이 찾아왔다. 산다는 것이 자못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스티그 라르손, [밀레니엄] 中
- 얼른 도시락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