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 20. 10:56

나는 스물다섯에 연애같은 연애를 시작했고 그 때 성관계도 시작했다. 대체적으로 좀 늦은 나이가 아닐까 싶은데, 연애를 하고서도 관계를 갖기까지 어마어마한 갈등이 있었다. 결혼전에 처녀성을 잃으면 안된다는 강박이 있었던 건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쁜 짓이란 생각을 했었더랬다. 음탕해서는 안된다는 게 나를 누르는 강박이었는데, 그러면서 뭔가 스킨십이 깊어지면, 이러다 섹스를 하게 되고 그걸 엄마가 알면 얼마나 실망할까, 섹스했다고 이 남자가 나를 음탕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같은 고민을 계속 했더랬다. 그래서 첫관계를 하고나서는 며칠간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이 되었었다. 이미 한 번 했으니 끝났나.. 같은 거. 


오늘 친구와 내가 알라딘에 쓴 리뷰 얘기를 하다가 자연스레 어릴 때 성추행 당한 얘기를 잠깐 언급하게 됐다. 잠깐 언급하는 그 짧은 과정에서도 내가 또 눈물이 나더라. 아, 나는 이거 거의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이거 완전 치유 안되는구나, 생각하노라니 또 슬퍼졌다. 그러면서 친구에게 얘기했다.


나는 어릴 적에 성추행 당한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내 자신을 원망한다, 그 때 내가 더 반항했다면, 얌전히 있지 않았다면 좋았을텐데, 그래서 자꾸 음탕하다는 생각을 했고, 이게 아주 오래 나를 사로잡았다, 고. 이 일은 성인이 된 후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나는 이 일을 극복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수차례 말하면서도, '음탕해 보이면 어떡하지?' 라는 고민을 내내 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먼저 섹스 하고 싶다고 말하는 일이 저어됐다. 섹스는 즐거운 일이어야 하는데, 첫 애인과 섹스를 하면서 그 섹스를 온전히 즐겨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어떤 날에는 내가 하고 싶은 적도 있었는데, 이걸 하다보면 더 좋을 것 같고 그래서 하고 싶었는데, 어떻게 해야 이 남자랑 또 섹스를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건 아주 단순한 일이었는데. 그냥 '나 섹스하고 싶어' 라고 말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나는 그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말을 내가 먼저 할 수 없다, 그러다 음탕해 보일라, 음탕하면 안돼.. 이게 아주 오래 나를 사로 잡았다.


그래서 나는 능동적인 섹스를 해야 한다고 계속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이 얘기를 오늘 친구랑 하는데, 친구 역시 그랬다고 했다. 자꾸만 나쁜짓을 하는 느낌이 들고 엄마 생각이 났다고. 이걸 우리가 깨부숴야 하는데, 지금 아주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이 억압은 확실히 없어지고 있진 않은 것 같다. 여전히 눈물나는 걸 보면 아직도 갈 길은 멀었는가 보다. 이 일은 완전 치유가 완되고, 성인의 성관계에까지도 영향을 미치는구나. 나는 여전히, 그러지 않으려고 진짜 노력하는데도, '음탕해 보이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음탕한 게 어디가 어때서,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거야, 라고 말하고 행동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쑥, 음탕해 보이면 어떡하지가 저 안에서 나를 기웃대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성폭행, 강간이 살인보다 더 나쁜 죄라고 생각한다. 명분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죄. 이건 그 후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니까. 아주 오래. 어쩌면 지워지지 않은 채로. 일전에 한 프로에서 어린이였을 때 성추행 당했던 여자가 성인이 되어 자살한 사건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십년이상을 잘 살아오는 걸로 보였지만 이 여자는 이걸 극복하지 못했던 거다. 나는 그 프로를 보다가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그 여자의 마음이 손에 잡힐 것 같아서. 


나는 아주 많은 여자들이 나와 같은 경험을 했다는 것을 안다. 당하지 않았어야 할 이 일을 당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운이 좋다'고 말을 해야 할 정도로 많은 여자들이 나와 같은 경험을 했다는 것을 안다. 내가 내 경험을 말했을 때 '나도 그랬어'를 말하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나는 그래서 대부분의 여자들이 피해자의 정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일은 극복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완벽히 치유되지 못하는 성질의 일인것 같고, 그런 피해자의 정서가 메갈과 워마드까지 갔던 게 아닐까, 하고. 그래서 나도 그들을 응원하면서 '겨우 말 가지고 그렇게나 광광대다니.. ' 하면서 어처구니 없어 하는 것 같다. 평생을 억압당하며 살아가는 많은 여자들이 있는데, 결코 완전히 치유되지 않는 기억을 가진 채로 삶을 사는 여자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말 좀 심하게 한다고 해서 뭘 그렇게들 지랄들이야......... 심하게 해봤자 늬들이 한 말을 돌려준 것 뿐인데...게다가 요즘에는 이마저도 다 뿔뿔이 흩어지지 않았나. 이 피해자의 정서는 이걸 가진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걸까?



친구랑 계속계속 서로에게 얘기하자고 했다. 우리가 뭔가 잘못하는 게 있다면 서로에게 그 점에 대해 지적해주고 그래도 우리 관계가 틀어지진 않을테니 계속계속 얘기하자고.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지금보다 더 극복하고 그 트라우마를 없앨 수 있도록 더, 더 얘기하자고. 우리가 서로에게 계속계속 얘기하는 이상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우리가 같은 경험을 했다는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이 일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은 그나마 큰 위로가 되는 다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서로에게 '그것이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수차례 얘기해줄 수 있다. 그렇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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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