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렇게 다 좋았을까를 생각한다. 함께한 사흘째의 아침이었나, 마주 앉아 조식을 먹는데, 그는 내 얼굴을 보고는 너 피곤한가봐 다크서클 내려왔네, 라고 했다. 안그래도 진짜 피곤했었다. 아 힘들어.. 막 이런 기분이었는데, 그 말을 듣고 룸에 돌아가 거울을 보니 아닌게 아니라, 다크가 진짜 엄청 진하게 내려앉은 거다. 아 힘들어. 조식을 먹으러 내려갈 때면 나는 세수도 안했었는데, 일어나자마자 그냥 원피스 훌렁 입고 내려갔는데, 하루는 머리가 너무 엉망인거라, 어쩌지, 했더니 자기 모자를 쓰라고 줬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한테 컸지롱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지간에, 그러니까 나는 민낯을, 다크가 내려앉은 얼굴을, 집에서 입은 막잠옷을 입은 내 모습을 그에게 보여줬는데(매일밤 그런건 아니고 어떤날 밤엔 가슴 절반 드러나는 잠옷도 입었더랬다), 이 모든 것들이 당시에 자연스러웠고 또 지금 생각하니 좋은 거다.
이게 특별한 일이 아닌데, 그러니까 그전의 연애에서도 당연히, 민낯을 보여주고 피곤한 얼굴을 보여주는 일이 있었는데, 왜 이번에는 이것들이 특별히 좋다고 느껴질까, 를 혼자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물론 내가 그에 대한 애정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늘상 만나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게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게 아닌 것 같은 거다.
외국에 있는 그와 내가 연인이 되었다고 했을 때 많은 친구들이 내게 그걸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는데, 내게는 그게 어렵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멀리 있는데 별 수 있나, 그렇다면 이렇게 해야지, 이것은 내게 너무나 당연한 답이었다. 이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게 누구든,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 있다면, 별 수 있어? 그렇게 연애하는거지, 라고.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이건, 나니까, 나라서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나이기 때문에 이게 가능했었던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런 사람이라서. 주어진 환경에서 장점을 잘 찾아내는 사람이라서, 하나에만 의존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분명 B 는 내게 큰 행복을 주는 사람이고, 그만이 줄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이 있지만, 나라는 인간은 그 기쁨과 그 행복에만 의존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서. 나는 요가를 시작했는데 거기에서도 기쁨을 찾고, 내 가족들에게서도 사랑을 느끼고, 내 주변의 친구들로부터도 항상 애정과 다정함을 느낀다. 이 모든 것들이 다양하게 나를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한다. 내게는 정말이지 좋은 사람들이 많고, 그들을 아끼며 잘 지내고 있다. 물론 폭탄도 맞아서 내가 지금 이렇게 스트레스 받으며 일하고 있지만, 멀게 또 가깝게 좋은 친구들이 언제나 소소한 행복과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일이 기쁘고 여행을 다니는 일이 기쁘다. 이 다양한 관계과 다양한 행위에서 오는 기쁨들 역시 나를 구성하고 있고, 그러므로 나는 그 먼거리에 있는 남자와 즐거이 연애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만약 내가 다른 기쁨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면, 아마도 그에게 하루가 멀다하고 너는 왜 멀리있냐, 왜 내곁에 없냐, 나는 지금 니가 필요하다 등등 엄청 징징대지 않았을까. 그러나 나는 그가 거기에 있음을 알고 있고 인정하고 있으며, 그에게 많은 시간을 사랑한다고 속삭이면서도, 책을 읽고 술을 마시고 친구들을 만나고 여행을 다니며 즐거워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먼 거리에서 오랜시간 보지 않고도 즐겁고 다정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건 만날 때에도 똑같이 작용했다. 함께 있는 시간동안 충분히 즐겁고 행복하므로, 아 이제 다음날이면 우린 헤어진다, 같은 생각하면서 우울해하는 일이 별로 없는 거다. 물론 그가 돌아가기 싫다고 할 때는 '가지마' 하고 귀에 속삭이긴 했지만, 헤어지는 순간에 울며불며 우리 이제 언제봐, 같은 걸 하지 않을 수 있는 거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서 아마도 우리는 이렇게 긴 시간을 다정하게 알며 지내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물론, 그 역시 이런 성향의 사람이어서 가능했을테고.
만약 우리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면, 언제나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면, 그렇다면 길게 유지되기 보다는 빨리 헤어지게 됐을까?를 생각해보니, 그렇다고 해서 또 그럴 것 같진 않다. 워낙에 내가 인내심과 다정함 인자함 등등을 가지고 있으니, 게다가 무엇보다 거리감을 중요시 하는 사람이니, 애정과 이 모든 성향이 뒷받침되어, 또 그건 그런대로 잘 지낼 수 있지 않았을까. 나의 성숙한 인격은 관계 유지에 아주 큰 역할을 했을 것 같은 거다.
생각해보면 매순간이 다 좋았다. 다크 내려온 눈으로 마주보던 것도, 내가 조식 먹을 거 별로 없었지만 있는 재료로 샌드위치를 잘라 반쪽씩 나누어 먹던 것도(이건 진짜 신의 한 수야, 혼자 다 먹지 않다니, 잘했어!!), 쇼핑했던 것도, 상을 차리고 밥을 함께 먹던 것도, 아무말 없이 함께 음악을 듣던 것도 다 좋았는데, 아마도 오래오래 내가 떠올리겠지만, 굳이 기록을 하자 싶었다. 이렇게 기록을 해두면, 나중에 오랜 후에 들여다봤을 때 또 생각나서 가슴 속이 꽉 찰 것 같아서.
나는 내가 이런것들로 가슴이 꽉 차는 사람인 게 좋고, 이런 걸 기록하는 사람이라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