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8. 21. 08:22

처음 샹그릴라가 만들어지게 된 건, 한 로맨스소설 사이트 덕분이었다. 우리 모두 그곳의 '손님'이었고, 다들 그 곳에 들어가 사이트 주인의 글을 즐겨 읽었더랬다. 그러다 여차저차하여 네 명이 모이게 되었는데, 그래서 우리는 만날 때 책 얘기를 곧잘 했었다. 서로 책을 한 권씩 선물하기도 했었고. 책 얘기를 많이 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모임의 정체성을 '독서'라고 주장했더랬다. 실상 만나면 음주가 더 주가 되긴 했지만, 어쨌든 이것은 독서모임.. 이라고 우리는 생각했어. 

만나면 늘상 고기를 구워 먹으면서 술을 마셨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멤버중에 고기를 먹지 않는 멤버가 생겼고, 책 얘기도 거의 하지 않게 되었으며, 한 멤버는 탈퇴를 선언하였다. 그렇게 세 명이서 유지해오다가 다른 한 명이 새로 들어왔다.

만나서 전시회를 보러 가기도 했었고 영화를 본 적도 있었다. 수목원에 간 적도 있었고 바다를 본 적도 있었다. 만나서 뭔가 하거나 보거나 한 적도 있었지만 우리의 주목적은 오랜만의 만남과 수다였다. 실상 단톡방으로 거의 매일 얘기를 나누는 친구들이지만, 만나서 하는 얘기는 또 그것과 다르니까.


그러다 이번에는 우리가 다함께 여섯시간짜리 강의를 듣게 되었다. 페미니즘 철학 강의였는데, 기존에 나는 이 강의를 하실 교수님으로부터 강의를 들어본 적이 있었고, 다른 친구들은 모두 처음이었다. 나는 혹여라도 이 긴시간, 토요일 하루를 거의 내어주는 이 강의가 혹여라도 지루하거나 어려워서 친구들이 불편해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친구들은 그걸 듣기로 한 건 자신의 선택이었다며 나를 다독여주었다. 그리고 다 함께 강의를 듣는데! 아, 페미니즘 철학은 어려웠다. 아니, '철학'이 어려웠다. 처음 플라톤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는 정신도 또렷하고 다 알아들을 수 있었는데, 점심을 먹고난 뒤의 들뢰즈 강의는, 식후의 나른함과 섞여서 집중과 이해가 어려웠다. 흙 ..  그래도 생각보다 길게 느껴지지 않는 시간이었고, 그렇게 무사히 강의를 마쳤다.


친구들과 저마다 강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나와 친구1은 현대 페미니즘에 대한 것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좀 아쉬워했다. 친구2는 너무 어려워서 못알아들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알아들을 수 있게 쉽게 설명해줘서 좋았다 했다. 친구3은 강의 자체가 좋았다고 했다. 덕분에 철학에 대한 흥미도 생긴 모양이다. 우리가 다함께 뭔가를 했다는 것, 그것이 공부라는 것, 우리의 공통된 관심사라는 것이 나는 너무 짜릿했다. 만나면 좋으니까 이렇게 십 년이상 이 만남을 유지해오고 있지만, 이번엔 특히나 나는 더 좋았다. 다같이 강의를 듣고 후기를 이야기하는 게 좋았고, 후기에 대한 거야 짧긴 했지만 결국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져 각자 다다다닥 얘기하는 게 너무 좋았던 거다. 우리는 제일 처음 '독서'로 만나긴 했지만, 지금은 우리 모두에게 '페미니즘'이 있다. 내가 강의 듣지 않을래? 물었는데, 한 번 들어보자, 라고 친구들이 응답해주었고, 너무 씐났다! 다음에는 좀 더 쉬운 강의를 같이 듣고 싶어...


우리가 함께 공부하고 함께 이야기나눈 이 날의 만남이 참 마음에 남는다. 


공부하려고 함께 모인 걸 찍겠다고 덤볐는데, 나는 진짜 수전증인지, 버튼 누를 때마다 화면이 흔들려서 눈이 죄다 흔들려 나왔다. 참나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메롱된 사진인 것이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친구들의 만남과 더불어 나는 나에게 이야기할 상대가 있다는 것, 친구들이 있다는 것에 크게 감사했다. 사람이 저마다 타고난 운이 있다면, 내게는 대화상대에 대한 운인 것 같다. 나에겐 항상 이야기나눌 사람이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친구들하고도 대화를 나눌 수 있지만, 나는 여동생 남동생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엄마랑도 그렇다. 마주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나눌 수 있는 상대가 내게는 여럿 있다. 블로그를 하기 때문인지 책을 읽기 때문인지 글을 쓰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 모든 걸 하는 '이런 성향'을 가진 나여서인지, 블로그를 하면서도 친구들을 여럿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 중 일부는 세이 굿바이 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최근에는 나무군과 책에 대한 대화를 많이 나눈다. 이 친구와는 독서와 페미니즘에 대한 얘기를 주로 나누는데, 내가 읽고 쓰기를 멈추지 않는한 내게는 늘상 이야기 나눌 사람이 있겠구나 싶다.



내가 허구헌날 모순을 앞에 두고 갈등하는데, 그걸 알기 땜시롱 나무군은 내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누군가 나를 사랑스럽고 멋있게 봐줄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인 것이여. 내가 이렇게 직장에서 스트레스 받지만, 이렇게 좋게 봐주고 이야기 나눠주는 사람들을 그래서 신은 내게 대신 주었는가봐...


작년 몇 월달이었지, 여름 무렵, 그때 역삼동에서 사주를 봤을 때 그때 선생님이 내게 그러셨다. 남자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항상 누군가 있다'고. '수다 떨고 술마실 남자는 항상 있어요' 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다 그들 중에 가끔 사귀자고 하는 남자들이 있는데 그럴때는 락방 씨가 '그건 니 자리 아니야' 라고 거부해요' 라고 하셨더랬다. 아아,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마침 그때 봄씨로부터 고백을 듣고 거절한 며칠 뒤였던 터라 더 크게 '억!!' 했더랬다. 진짜 그렇구먼, 하고. 내가 봄씨와의 관계에서 후회하는 건, 거절했으면 그냥 이야기상대로만 머물면 됐었는데, 너무 데이트를 해버려가지고...죽도밥도 아니게 만들었어. 괜히 사람 희망고문해서 나락으로 떨어뜨려 버렸어..그래서 나는 좋은 술친구, 수다 친구를 잃었다. 그때 그냥 '아니야' 하고는 좀 멀찍이 거리를 유지했어야 되는데, 하아, 내가 너무 제멋대로 해버렸어... 내가 잘못했다... 


아 이 의식의 흐름... 이런 이야길 쓰려고한 게 아닌데..




그런 한편,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 상대를 여럿 줘놓고서는, 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일상일 수 있는 것을 내게는 특별한 어떤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람과 쇼핑을 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술을 마시고 하는 것들, 대부분의 연인들에게 너무나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들을, 내게는 주지 않으셨어..신이여.. 그래서 나는 그 평범한 것, 아무것도 아닌 것, 누구나 그냥 아무때나 늘상 하는 것을, 굳이 말레이시아 까지 가서 해야 했어... 하아- 왜 내게는 그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너무나 특별한 것이 되어버리는 것인가. 이 생각을 요즘에 하면서, 어쩌면 내가 이런 것들을 잘 해내지 못할 사람이라서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이것이 일상이 되면 지쳐버릴 사람이라서, 지겨워할 사람이라서, 그래서 신은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알고 있으므로, 이것을 이벤트로 만들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게 된 것이다. 왜 남들에게 일상이 내게는 이벤트여??? 


게다가 이것은 이벤트라는 특성상, 내게 또 언제 다시 올지 알 수가 없다. 오늘 퇴근후에 만나자, 같은 게 결코 될 수가 없어. 만약 내가 B 랑 지금같은 관계를 계속 유지하게 된다면, 그렇다면 내년이나 후년언제쯤, 아니면 그보다 더 오랜 후의 언제쯤, 또 어딘가에서 만나서 남들의 일상같은 특별함을 살겠지. 만약 B 랑 이제 헤어지게 된다면, 우리의 말레이시아 만남은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 될것이다. 그는 그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다른 여자를 만나서 결혼하고 싶어하고, 그렇다면 나와는 헤어지는 것이 우리 앞에 내려진 결론인데, 그러면 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며칠이 그냥 평생에 걸친 기억에 남는 이벤트가 되는 것이 아닌가. 정녕 이것이 나의 팔자인가? 

팔자여...

운명이여.....

우리의 마지막 이벤트 음식은 바쿠테이며 스테이크인가......

신은 나를 사랑하므로, 아마도 내게 이것을 일상으로 주지 않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토요일, 친구와 함께 있는 호텔에서 타미의 전화를 받았다. 이모 어디야, 묻는 전화. 아, 나는 진짜 이 아이가 너무 좋아. 며칠전에 여동생이 타미랑 둘이 데이트 중이라며 파스타를 먹을 거라 하길래, 야, 타미 먹는 거 사진 찍어 보내줘, 했다. 나는 이 아이가 뭘 먹는 게 너무 예뻐 ㅠㅠ 보면 막 미치겠어 ㅠㅠㅠ 먹을 거 잔뜩 사주고 싶어. 그게 아이스크림이든 빵이든, 밥이든 뭐든... ㅠㅠ 이것이 사랑인가봐. 나의 사랑은 너에게 뿜뿜한다..




사주와 팔자 얘기를 하다보니 또 생각나는데, 그때 역삼동 사주 쌤은 내게 계속 공부한다 하셨다. 계속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하려는 사람이라서, 철학을 가까이 하게 된다고. 그래서 글을 쓰는 일은 내게 무척 이로운 일이라 하셨다. 내 글은 점점 더 나아질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그 고민과 공부가 계속 글에 드러나게 될거라서. 내 팔자는 이런 것인가 보다. 공부하고 글을 쓰고 이야기를 나누는 거. 물론, 나쁘지 않다. 내가 좋아하기 때문에 이게 내 팔자가 된 것 같다.


사는 동안 즐겁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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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