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6. 5. 17:50

옛날 남자친구 얘기를 해 드리죠. 그는 온라인에서 만난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져" 버렸답니다. 사진 한 장을 본 적이 없는데도 그는 채팅을 하면서 상상의 세계를 살았어요. 나는 환상 속의 그녀를 누르기 위해 관능적인 짓은 그 어느 것도 마다하지 않았죠. 그녀는 남자친구가 듣고 싶어 하는 것은 뭐든지 얘기해줬어요. 말하자면 그녀가 그의 판타지를 충족해 준 셈이죠. 실상 한 번도 존재해 본 적이 없는 누군가와 내가 경쟁을 했던 겁니다. 그 경쟁은 그랑 하는 게 아니라 그녀랑 하는 시합이었어요. 그가 이 "환상 속의 여인"과 나를 비교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나는 그 생각을 떨쳐 버리기 위해 줄곧 노력해야만 했죠.      -이성애자 여성, 41세 (pp.171-172)





여자가 섹스를 하는 237가지 이유

저자
신디 메스턴, 데이비드 버스 지음
출판사
사이언스북스 | 2010-09-06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다양한 민족, 다양한 연령, 다양한 성 정체성을 가진 1000여...
가격비교



싸워서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있다. 뭘 해도, 뭘 어떻게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 인용한 것처럼 '환상속의 상대' 역시 그런 상대일테고, '애인의 전여친' 도 싸워서 이길 상대가 아니다. 왜 싸워서 이길 수 없을까? 그건 '상대는 나랑 싸우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싸움은 나 혼자만의 싸움이고, 상대는 나의 존재자체를 알지도 못하며 그러므로 나랑 싸우고 있지도 않다. 명백하게 이건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지는 싸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있다. 내가 현재 애인을 만나면 전애인을 지우는 것처럼, 그에게도 나를 만나면서 전여친은 지워질테니까. 게다가 그가 전여친과 나를 비교하고 있지도 않은 상황, 평화로운 상황에서도, 어떤 여자들은, 그리고 나 역시, '그의 전여친'과 싸운다. 정말이지 전혀 할 필요가 없고, 말도 안되는 싸움. 이성적으로는 '미친 상황'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상태란걸 뻔히 알면서도, 감정적으로 싸우고 있다. 병신같다고 스스로 아무리 뺨을 때려봤자 그렇게 된다. 우습게도 이건 같은 여자들끼리 말하여질 수 있다. 간혹 연애중인 여자친구들에게 말을 건다. 그의 전여친을 질투해봤어? 이미 헤어졌는데? '그렇다'는 대답이 날아오면, 우습게도 기뻐지는 것이다. 나만 이러는 게 아니야!! 


이 병신같은 집착에 대해 최근에 만난 여자사람친구1과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 다 알잖아, 알지만' 하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몹시 즐거웠다. 나는 남자가 좋지만, 좋아하는 남자에 대해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여자친구도 너무 좋다. 싸워서 이길 수 없는 전여친에 대해 멍청한 짓이란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간혹 드러나는 이 열등감과 집착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러면서도 좋다고 웃어버렸다. 물론 이 싸움이 24시간, 365일 내내 지속되는 건 아니고, 생활 전반에 자리잡고 있지도 않으며, 연애의 한쪽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그런 심리가 있음을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솔직하게 털어놨다. 아, 연애의 구질구질함.



조낸 쿨쉭한 녀자 인줄로만 알고 있다가, 나는 전혀 그렇지 않음을, 집착에 쩔고 질투에 쩔고 시기에 쩌는 여자임을 이번 연애로 깨닫고 있는데, 내가 이런 사람임을 알고 수시로 B 는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 나로 하여금 점점 안정감을 찾을 수 있게 한다. 미친 집착과 질투와 시기는, 처음에 비해 많이 안정적으로 가라앉았다. 이 관계, 이 연애에 있어서 이것이 지속되는 이유는, 나는 '나의 애정' 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 크게 어쩌면 '그의 노력'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여자사람친구1은 나와 이런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층 더 내밀한 속내를 드러내보였다. 우리는 페미니즘에 대해 분노하려고 하면서, 분노하면서,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하기에 모순된 존재가 아닌가' 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와 나 모두, 현재의 연애, 그 연애와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이 일맥상통하며 언행의 일치가 되고 있는가, 를 돌이켜보았을 때, '그런가?'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연애는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것이라, 둘 사이의 일을 외부에서 보면 제대로 볼 수 없는 법이지만, 외부에서 누군가 우리의 연애를 들여다보게 된다면 '페미니즘과 어긋나'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친구1은 그런 생각 혹은 고민으로 인해 페미니즘에 대한 발언을 하기가 조심스럽다고 했고, 나 역시 그런 발언을 하면서 이렇게 연애를 하는 것이 모순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그저 생각해보고 고민만 해볼 뿐이다. 우리의 상대는 우리에게 현재 최상의 상대이고, 또한 '이런 사람이라서 너무 다행이야'라는 생각을 하게 해주는 사람이지만, '나'는, 잘하고 있나, 이래도 되나, 괜찮은건가? 그렇지만 연애가 '맞을'수 있는게 아니니까.



친구는 애인에게 '니가 나에게서 높이 사는 점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몇 가지의 답을 들었고. 이 질문이 좋아서, 나도 혹여라도 연애를 하다 내 자존감이 조금 바닥으로 낮게 가라앉았다는 생각이 들라치면 물어야겠다. 당신이 내게서 높이 사는 점은 뭐죠, 하고. 


없나..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이 친구와 내가 만나고나서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서로가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예전엔 짐작조차 못했었던 일이고, 그래서 우리의 만남이 특별히 더 즐거울 수 있다는 것도 짐작조차 못했던 일이다. 


오늘 알라딘에서 책방출 하다 내가 실수를 저질러서(병신 ㅠㅠ), 책을 받기로 한 분들과 문자메세지를 주고받게 되었는데, 그중 한분이 '알라딘의 셀렙과 문자를 트게 되다니' 라고 말씀하셨다. 하하하하하. 알라딘 셀렙이라니. 알라딘에서 변방의 서재인으로 지내던 아득한 때가 떠올랐다. 그때당시 친하게 지내던 알라디너와 그런 대화를 나누었더랬다. 어휴, 즐찾수가 40명 되면, 그때부터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요, 40명 되면 조용히 은퇴할래요, 라고. 그런데 어쩌다가 나는 이렇게 먼 길을 오게 되었는가. 어쩌다 천 명이 훌쩍 넘어버렸나....그러다 급기야 알라딘 셀렙이란 칭호까지 듣게 되었나. 나는 누군가 여긴 어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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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