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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4.12.24 떨린다 14
  3. 2014.12.23 임원 6
  4. 2014.12.22 나는 가장 아름답게 생을 탕진하는 중이다. 8
  5. 2014.12.18 본연의 나
  6. 2014.12.16 아빠 6
  7. 2014.12.16 하아- 2
  8. 2014.12.16 2
  9. 2014.12.06 약속한대로 2
  10. 2014.12.03 둘째 6
2014. 12. 29. 12:43

여동생은 언젠가 내게 자신의 계획과 그 계획대로 살고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꽤 오래전의 얘기인데, 그당시에 여동생은 서른에 결혼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했어, 라고 했더랬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아, 뭐 이렇게 살 수도 있나? 했더랬다. 나로 말하자면 인생은 순간순간 무계획으로 살고 있다고 그때만 해도 생각했었으니까. 여동생의 말이 좀 충격이었던 것이, 당시 친근하게 지내던 남자사람후배 k 때문이기도 했는데,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발표를 하고난 후 합격했으며 또한 자신이 설계한대로 좋은 집안의 여자를 만나서 결혼해 아이까지 잘 낳고 사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인생은 계획대로 사는 것이구나, 하고 나는 놀랐었다. 정말이지 그때만해도 나는 내가 '무계획'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얼마전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를 보고난 뒤, 내가 어쩌면 내 계획대로 살고 있는 사람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영화가 그런 생각을 하게끔 도와줬다기 보다는 아주 작은 소재가 되어주었는데, 그 영화를 보면 스위스의 실스마리아란 지역이 계속해서 나오고 그 곳의 풍경은 정말이지 장관인거다. 영화 도중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줄리엣 비노쉬는 실스 마리아의 산을 오르고 또 아무도 없는 적막한 그곳의 해변을 가 옷을 벗고 풍덩- 뛰어드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을 보고 나는 언젠가 스위스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으며 동시에 이런 생각을 한 것이다.


다이어트를 열심히 해서 몸이 좀 내 생각대로 만들어지면 5월달쯤 부터는 수영을 배워야겠다, 고. 그리고 이 계획에 대해 여동생에게 얘기하면서 


'풍경 좋은 해변에서 남들 다 옷벗고 뛰어드는데 나는 수영을 못해 가만히 그들만 바라본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 속상한거야. 수영을 못하면 인생에서 즐길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놓치는 게 아닐까 싶더라고.'


라고 했다. 여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보니 나는,


2015년 2월에 괌에 가족들과 함께 할 비행기 티켓과 호텔을 예약해두었고, 7월의 제주도를 예약해두었고, 8월의 포르투갈을 예약해 두었다. 아직 오지도 않은 2015년에 대해 벌써 이렇게나 예약을 해두다니, 나란 인간은 계획형 인간인가 싶어진 거다. 물론 저것들중 일부는 변경되거나 취소될 수 있을 것이다. 전부가 그럴 수도 있고. 그러나 나는 '하기 위해' 예약해 둔 것이다. '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래서 내 인생을 여태 곱씹어보니, 나는 내가 계획한 대로 살고 있었고 또 내가 그리는 미래속 그대로 와있었다. 나는 내 인생 서른에 결혼을 하겠다 같은 계획을 세워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게 아닌 다른 계획들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계획들을 갖고 있었다.


언젠가 뉴욕에 갈 것이다

언젠가 책을 쓸 것이다

언젠가 연락처를 모르는 B 를 만나러 갈것이다


내가 굳이 '언젠가' 라고 설정한 이유는 내가 이 계획들로 인해 내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나는 스트레스에 굉장히 취약한 사람이고, 무언가 해야 한다는 압박이 들어오는 순간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되므로, 기간을 넓게 정해둔 것이다, 어쨌든 저것들을 모두 이뤘다. 비록 짧게지만 스물아홉에 뉴욕에 다녀왔고, 비록 소설은 아니지만 책도 나왔다. 그리고 연락처도 모르는 B 와 요즘은 매일 연락하고 살고 있다. 꿈이라고만 생각했던 일들을, 나는 다 해내고 있었다. 물론 이것이 내가 세워놓은 계획의 전부는 아니다.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계획들을 이루어 질 것이라고 지금은 믿는다. 사람은 어찌됐든 정말 하고 싶은 걸 위해서는 뭐든 액션을 취하기 마련이니까. 저 세 가지의 것들에 대해서 액션을 취한 주체는 '나'였다. 저 계획들이 '나의' 계획이었으니까. '파울로 코엘료'는 자신의 소설 《연금술사》에서 간절히 원하면 세상이 도와줄 것이다 라고 얘기했고, 나는 세상이 나를 도와줬는가 보다 라고 생각했었지만, 훗, 다 내가 했다. 내가 액션을 취한 거다. 


결국 나는 내가 계획형 인간임을 요즘에야 인정하고 있다. 다만 타이트하게 계획하지도 않고 시간을 정해두지 않는데, 그것 역시 내 계획의 일부인 것이다.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을 것'. 



토요일에는 여동생에게 말했다.


나 요즘 행복해.


여동생은 묻지도 않고 그저 손을 내밀어 내게 악수를 청했고, 나는 그 손을 마주잡아 흔들어 주었다. 그날 내가 던진 부정적 말에 긍정적인 답변으로 받아쳐준 것은, 오래 내게 남을 것이고, 주술이 될 것이다.



토요일에 안산으로 가던 도중 남동생은 내게 물었다.


누나 요즘 연애는 하고 사냐?


나는 응, 이라고 답했고 그러자 남동생이 다시 물었다.


혼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나또 빵터졌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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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
2014. 12. 24. 14:56

k 부장은 가끔 여직원들에게 성희롱을 한다. 다른 임원들은 안그런데 부장이 한다. 본인은 애정의 표시이며 장난이고 친근감의 표시라고 말하지만 당하는 여직원들은 싫어한다. 그는 손을 잡자고 말하고 자기 품에 안기라고 말한다. 간혹 뽀뽀하는 시늉도 하는데, 지난번에 한번은 실제로 뽀뽀를 하기도 했다. 당한 여직원에게 전무님께 말하든가 고소를 하든가 하라고 했지만, 실상 근무하고 있는 중에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 자기 때문에 회사 분위기가 흐트러지는 걸 참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전무님께 가 말씀드렸다. 이러이러한 일이 있다, 직원들이 말도 못한다. 그러니 다시는 그러지말라 말좀 해주시라, 고. 그때 전무님은 부장을 불러 따끔하게 한말씀 하셨다고 했다. 그는 알았다고 답했고, 그 뒤로 약간 잠잠해지는 듯 싶었다가, 어김없이 예의 까불까불-애 둘의 아빠이다- 희롱을 했다. 본인은 여전히 그것이 희롱이라고 인정하지 못하면서. 못하는지 안하는지, 그는 오늘 꽤 심한 장난을 쳤고, 당한 여직원은 소리 지르며 울었다. 이에 당황한 부장은 미안하다 다시는 안그러겠다고 했지만, 나는 이걸 이대로 두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뭘 해야겠다, 고 생각했다.


가장 먼저 생각해낸 방법은 그가 있고 다른 여직원들이 있고 보쓰의 딸이 있는 사무실에서 공개적으로 말하는 거였다. '너 한번만 더 그러면 내가 회장님께 직접 너를 얘기하겠다' 라고. 모두가 듣는데서 개망신을 주고 협박할 참이었다. 나는 보쓰의 비서이고, 나는 이런 일에 있어서 아무도 하지 않는다면 내가 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예전에 공장에서 이런 일이 있고 내 귀에 들어왔을 때, 그때 가해자는 '임원'이었고, 당장 회장실에 들어가겠다는 나를 전무님이 말리셨더랬다. 잠깐만 참아달라고, 해결해 보시겠다고. 그리고 결국 시간이 지나 그 임원은 짤렸다.


나는 내가 보쓰의 비서란 걸 이럴 때 힘껏 이용해줄 생각이었다. 게다가 나는 다른 부서에 근무하다 보쓰가 '데려간' 직원이다. 나는 평소에 보쓰를 싫어하지만, 보쓰가 이럴 때 어떻게 행동할 지는 알고 있다. 아주 오래전에도 나는 같이 근무하는 임원의 자리를 바꾼 적이 있다. 그때는 비서가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보쓰에게 말했다. 저 분이 앉는 자리가 내 옆이 아니길 원한다고. 그때 보쓰는 그 임원의 자리를 구석으로 밀어버렸다. 나는 내 힘을 알고, 이 회사의 임원들이 내 힘을 안다는 사실을 안다. 고작, 일개 '비서'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회사에서 십년 이상을 근무해왔다. 나는 같이 근무하는 임원이 공금횡령으로 쫓겨날 때 바로 밑의 직원였음에도, 다음해 비서실로 불려갈 정도로 신뢰가 쌓여있다. 나는, 내가 말하는 것이 가장 힘이 셀 거라는 걸 알고 있다. 전무님은 공장의 잘린 임원에게 '그때 비서과장이 말한다고 해서 내가 말렸다'는 얘기도 했더랬다. 나는, 평소에 그다지 힘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여기에 있어서만큼은 내 지위를 한껏 이용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보쓰의 딸이 있는 자리, 모든 직원들이 있는 자리에서 말하는 것이 과연 현명할까, 라고 했을 때 좀 갸웃해졌다. 어쩌면 그 부서의 팀장인 전무님이 난처해질런지도 모른다. 일단은 전무님이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게 나을 것이다. 바로 보쓰의 딸을 통해 보스의 귀에 들어가는 것 보다는, 전무님이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나을 것이다. 물론, 보쓰의 딸이 말을 할지 안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생각해냈다, 약간 더 부드러운 방법을. 그리고 전무님실로 내려갔다.



여자 과장 두 명을 불러 전무님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전무님께 '드릴 말씀이 있으니 k부장을 불러 들어오라고 해주세요' 라고 했다. 전무님은 무슨일이냐 놀라서 물으시고는 내가 대답할 생각이 없다는 걸 알고 부장을 불렀다. 부장님이 들어왔다. 그래서 말했다.



제가 보쓰의 딸이 있는 사무실 바깥에서 말을 하려다가 전무님 입장 난처하실 것 같아서 여기서 말씀 드리려고요.


전무님은 놀라서 말해보라 하셨다.


제가 지금 k 부장 듣는데서 얘기하는 겁니다. 만약 k 부장이 여직원 희롱했다는 소리 한 번만 더 들리면, 저 그자리에서 회장님께 보고 들어갑니다. 제가 직접 말씀드릴거에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무님과, k 부장과, 과장 두 명이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실은 피해자도 불러놓고 얘기할까 싶었는데, 일로도 많이 부딪히니 이건 나중에 따로 말해주자 싶었다. 전무님은 내 말을 듣고 대체 이게 뭔 소리냐 물었고, 나는 오늘 k 부장이 장난 쳐서 여직원 한명이 울었다, 나는 이걸 한번만 더 하면 회장님께 직접 보고드리려고 한다는 뜻이다, 라고 했다.


전무님은 k 부장에게 호통을 치셨다. k 부장은 우리가 있는 앞에서 잘못했다, 앞으로는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하겠다, 고 말했다. 분위기는 삭막했고 오늘의 분위기로 보건데, 내가 얼마만큼 진심인지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k 부장의 표정과 말투가 그랬다. 평소 k 부장과 나는 아주 친한 사이다. 매우 친한 사이었지만, 이런 일에 얄짤 없는 법. 


말하는 동안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누가 대신 말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도 대신 말해주지 않았다. 말하고 나서도 손발이 부들부들 떨려 진정이 되질 않았다. k 부장에게 재차 다짐을 받고 전무님 실을 나왔다. 그리고 내 자리로 돌아와 피해 여직원에게 핸드폰으로 통화하자고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을 말했다. k 부장 불러서 직접 얘기했노라고. 회장님께 직접 보고 드리도록 하겠다고 했다는 얘기까지 했다. 여직원은 내게 고맙습니다, 과장님. 이라고 했다. 



아..아직까지 진정이 안돼.

그렇지만, 또 떨리더라도, 한번만 더그러면 나는, 정말로 회장님실 문을 노크하고 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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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
2014. 12. 23. 18:03

아..
있던 임원도 빡치는데 새 임원이 와서 더 빡치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나 오래 근무했다고 나한테 관심 조낸 많아. 완전 친해지고 싶은가봐 ㅜㅜ
싫어 ㅜㅜ
나한테 신상에 관해 묻지마.
내 퇴근후의 일정을 묻지마.
꺼져버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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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
2014. 12. 22. 18:01

사흘 뒤

제목 없음


안녕, 에미. 당신도 방금 창밖 내다봤어요? 유령이라도 나올 것 같지 않아요? 우박폭풍이 몰아치는 걸 보면 꼭 지구 종말을 알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늘에 이상한 황갈색 막이 드리우더니 난데없이 거기에 시커먼 커튼이 펼쳐지고, 곧이어 수천수만 개의 하얀 자갈이 어마엉마한 속도로 쏟아지는군요. 그 영화 제목이 뭐였더라? 거북인지 개구린지 닭인지가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영화 있잖아요. 혹시 알아요? 잘 있어요. 레오. (p.213)



개구리가 내리는 영화는 매그놀리아, 라고 그가 불쑥 말했고 새벽 세시를 안주삼아 잭콕을 마시고 있던 그인지라 새벽 세시에 그 얘기가 나오는가보구나 했는데 나로서는 전혀 기억나질 않았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와, 낯선 곳 낯선 상황에 두려웠던 마음을 달래며 그런데 그게 새벽 세시에 나오는 구절이더냐, 했더니 그렇다고 했다. 나는 현재 책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읽어달라 했고, 그 새벽, 전화기 너머에서 그는 이 구절을 읽어주었다.


아, 이런 문장이 있었네, 레오가 이랬네, 하던 것보다 더 먼저 

아, 참 좋구나, 했다.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책을 읽어주는 것, 말이다.

낯선 두려움 속에 떨다 집으로 돌아와 내 방 내 침대에서 포근하게 이불을 덮고 좋아하는 사람이 읽어주는 책을 가만히 듣고 있는 새벽. 심지어 그 책은 내가 좋아하는 책. 이 모든게 너무 좋아서 히죽히죽 웃음이 나왔다. 행복하다고도 생각했다.


조금만 더 읽어줘요 라고 했던가, 그 다음도 읽어줘요 라고 했던가. 나는 이 상황과 이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터. 그는 계속 읽어준다.


1시간 30분 뒤

Re:


동물농장. 개구리 왕.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레오, 사흘 동안이나 아무 소식도 없다가 기껏 이런 생뚱맞은 동물 애니메이션 이메일로 저를 어이없이 만들어야겠어요? 다른 수신자를 찾아 보시죠. 저는 거의 반 년 동안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당신에게 성실하지 못했어요. 당신과 날마다 많은 시간을 여기서 보내지 못했죠. 그 결과 우리가 급기야 폭우나 하늘은 덮은 황갈색 막에 대해 얘기하게 되기에 이르렀군요. 저에게 당신 얘길 하고 싶으면 하세요. 저에 대해 알고 싶은 게 있거든 물으시구요. 하지만 여기서 날시 얘기를 하는 건 어울리지 않아요. 당신 눈에 갑자기 우박만 보이도록 미아가 당신 고개를 돌려놓았나요?

미아 얘기 나온 김에 몇 가지 더 물을게요. 혹시 미아더러 당신과의 만남에 대해 아무 얘기도 말라고 하셨어요? 사춘기 아이들처럼 자기들끼리만 대단한 비밀이라도 있는 양 쉬쉬 하다니, 대체 이 무슨 유치한 장난인가요? 레오, 솔직히 말하면 당신과 더 얘기할 마음이 없어졌어요. 안녕히 계세요. 에미. (p.214)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저자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08-04-1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사랑이 이메일을 타고 오다! 매혹적이고 재치 있는 독일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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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엔, 내가 그에게 읽어준다. 새벽 세시를 읽어주고 싶었지만 내가 현재 가지고 있지 않았고, 나는 어떤 책을 읽어줄까, 하고 생각하다 전화기를 들고 가 내가 좋아하는 책들만 가지런히 꽂힌 책장 앞으로 간다. 줌파 라히리와 올리브 키터리지가 보인다. 그것들 중 한 권을 꺼내려다가(지옥-천국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떡- 하니 자리한, 사랑의 미래를 꺼내든다. 아, 이렇게 맞춤한 책이.



그가 선물한 책이다.




그는 그녀를 2인층으로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은 그와 그녀가 은밀한 2인 공동체를 결성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나'와 '너'만의 성채 속에서, 두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채, 완전한 소통을 이루었던 것이다. 둘만의 작은 공간에서 깊게 흔들리는 눈을 들여다보고 '너'라는 이름을 부르거나, 한 사람만을 위한 은밀한 언어들을 메일로 보낼 때, 그들은 완벽하게 세상과는 절연된 2인의 왕국을 만들어낸 것 같았다.


어느 환한 봄날의 꽃그늘 아래서, 그가 지상에서 가장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을 때, 다만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그 시간은 완벽했다. 그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시간은 모든 모욕을 잊어버리고 조용히 닫혔다. '너'를 부르는 것 자체가 이미 어떤 간절한 전언을 머금고 있었다.


2인칭은 주술의 호명이다. 한 사람이 누군가를 2인칭으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은, 당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 '당신' '그대'라고 호명할 때, 2인칭은 언제나 지금 현전하는 것을 대상으로 한다. '내'가 부를 때, '당신'은 내 눈앞에 있어야만 한다. 혹은 '내' 목소리를 당신이 들을 수 있어야 한다. 2인칭은 1인칭이 만들어낸 간절한 대상이다. 1인칭이 2인칭을 부르는 그 순간, '나'는 '너'로 인해 '내'가 된다. 2인칭 당신이 있기 때문에 1인칭은 2인칭을 그리워하거나, 간절히 바라거나, 혹은 원망하거나 증오할 수 있다. 2인칭은 매혹적이고 불길한 호명이다. (p.42)



읽어놓고 웃었다. 어색하고 간지러워서.


한꼭지 더. 

어디가 좋을까 뒤적이다가 찾아낸다.

 

 

그녀를 기다리는 차 안에서 그는 백미러 속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그 기다리믄 모호한 행복과 날것의 불안을 뒤섞었다. 기다리는 순간만큼 순수하게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시간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기다리는 순간은 그 사람에 대해 간절하고 비장해진다. 백미러 속으로 모르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어느 순간 그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 사람은 그의 기다림에 대해 유일하고 절대적인 사람인 것 같다.

 

그러나 기다림은 하나의 착란이다. 기다림의 착란은 그가 기다리는 미래라는 것이 하나의 환상이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환상에 볼모로 잡혀 있는 그의 현재를 말해주었다. 그녀에게 더 이상 기다림의 말을 하지 않게 되고, 그들 사이에 어떤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이제 자신의 기다림의 자세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그는 그녀를 기다리던 장소를 습관처럼 지나다가 백미러를 들여다보았다. 11월의 찬비가 내리는 거리에서, 기다림이란 이미 착란적인 습관이었다. 그녀가 나타날 이유는 없었지만, 어떤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가 기다리는 것이 그녀가 아니어도 좋았다. 어쩌면 그의 욕망은 그녀라는 대상이 아니라 기다림 자체에 머물렀는지도 몰랐다.

 

가장 지독한 기다림은 기다림의 기척을 내지 않는 것.

기다린다는 것을 절대로 알리지 않는 기다림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불가능한 것에 대한 가장 순수한 기다림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다리지 않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p.123-124)

 

 

 

우리는 기다림에 관한 예의, 그 농담을 시작한다. 깔깔대고 웃다가, 다른 꼭지를 더 읽는다.

이 부분을 읽기 전에는 아주 많이 뜸을 들였다. 후- 후- 심호흡을 자꾸 했다. 가장 아름답게 생을 탕진하는 장면이었다, 라는 문장이 눈에 밟혔다. 나는 아름답게 생을 탕진하는 중이로구나, 했다. 어느 부분에서 내가 그토록 떨렸던건지.

 

 

사랑은 무거운 생을 송두리째 들어 올리는 축제의 시간을 만나는 것이다. 상투적이고 지리멸렬한 시간으로부터 전속력으로 도주하는 에너지 같은 것. 세상의 모든 축제는 일시적이고, 얼마간의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축제는 그 안에 방탕과 폭력을 포함하고 있으며, 때로 그것은 죽음과 맞먹는 삶의 폭발적인 낭비를 의미한다.

 

그들에게 구체적인 미래가 보장된 것은 아니었으나, 이국의 땅으로 함께 여행하는 상상은 로맨틱한 것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떠들썩한 축제가 열리는 낯선 땅에서 이방의 리듬에 맞추어 손을 잡고 축제의 행렬을 따라가거나, 그 행렬이 지나는 호텔의 2층 창에서 다른 별의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내려다보고 싶었다. 영원히 취기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술을 마시며 서로의 상기된 눈빛을 어루만지고 싶었다.

 

그 순간, 어떤 미래의 약속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가장 아름답게 생을 탕진하는 장면이었다. (p.107)

 

 


사랑의 미래

저자
이광호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11-10-11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한 편의 시처럼, 소설처럼 다가오는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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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하지 않았던 그의 말이 가슴에 오래 남는다.

당신을 처음 알게됐던 칠년전에는 우리가 이렇게 서로에게 책을 읽어주게 될 줄은 몰랐는데, 했던 말.

그는 가끔 자신도 모르게 그냥 던지는 말이 내게 아주 오래 남는다는 것을 알까.

오래전 겨울에, 이빨 교정했냐고 물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동동주를 앞에 두고 당신은 술취하면 예뻐지네, 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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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18. 10:40

"크리스가 보고싶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나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는 걸 보았어요. "그렇다면 내가 그라고 생각해 봐요." 나는 내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몰랐어요.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죠. 갑자기 그것이 가능한 하나의 방법 같았어요. "뭐라고요?" 그녀는 이렇게 말했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어요. 내가 다시 말했어요. "내가 그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천천히, 어둠 속에서 말없이, 우리는 했어요. (p.95)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저자
모신 하미드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2-11-3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사랑에 빠진 파키스탄 청년, 9.11을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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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고 싶은 나와 본연의 나는 다르다.

나는 다른 나를 연기할 수도 없다. 그렇게 생겨먹은 인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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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
2014. 12. 16. 16:58



어제 아빠가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보고 싶다고 하시길래 급예매 해드렸었다. 엄마가 여동생 집에 가있는 관계로 오시면 두분꺼 함께 예매할까요 하니 네 엄마는 영화 싫어하니 당신 것만 하라셔서 그렇게 했다(엄마도 잘했다고 했다 ㅎㅎ). 그리고 오늘 보러 가셨는데 내가 극장 설명을 충분히 안해줘, 평소 나와 함께 가던 극장에 갔다가 부랴부랴 다시 제대로 찾아가신 모양.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더니 도착했는데 아직 시작 안했다고 괜찮다고 하셨다. 

영화 보고 나오셨겠다 싶어 문자 드리니 '슬프고 앞으로 내게 닥쳐올 일 같다'는 말에 뭔가 갑자기 찡- 해졌다. 그래서 나도 보려고 급예매. 


그런데 하하하. 노인네 둘이서 살다가 할배가 먼저 저세상 가버린거라고 쿨하게 정리해버리시네. 암튼, 나도 보러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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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
2014. 12. 16. 11:56

씨발. 언제까지 나의 유입 키워드에       ㅈ       ㅇ         가 나와야 하나. 이거 평생 나올래나. 사람들 저거 왜저렇게 검색해. 아놔. 애초에 저 단어를 일기에 쓴 내가 병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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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
2014. 12. 16. 11:53

아빠는 종종 내게 빨갱이라고 하셨다. 내가 술 마시고 밤에 늦게 들어올 때나 아빠가 뭔가 하라고 했을 때 '싫어'라고 말하면 그렇게 말하곤 했다. 뭔가 분노에 차서 한 말은 아니었고, 그저 '내 말 안듣는 자식'이란 의미에서 한 말이긴 한데, 그걸 뭐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않지만 여튼 빨갱이란 말은 되게 듣기 싫었다. 말 안듣는 거에 빨갱이라 응수하는 건, 뭔가 사상적으로 세뇌 된 듯한 무식함이 드러나는 발언인 것 같았달까. 우리 아빠가 다른 말도 아니고 빨갱이를 그렇게 입에 자주 올린다는 게 너무 싫은 거다. 나는 허구헌날 빨갱이란 소릴 들었고 뉴스 보다가 싸우면 또 들었다. 아빠가 보기에 나는 종북 빨갱이 편인 것이다. 


그런데 어제부터는 조현아 같은 지지배로 바꾸셨다. 헐. 어처구니가 없다. 어제 뭔가 얘기하다가 나랑 뜻이 안맞으니 조현아 같은 지지배야 한것. 역시 여기에도 화나 분노는 없었고 나를 기분 나쁘게 할 의도는 없었다. 뭐 딱히 기분 나쁜건 아니지만, 뭔가 좀.. 그냥 아 좀 저러지좀 말지 싶었달까. 우리 아빠가 빨갱이나 조현아를 입에 담고 그걸 욕처럼 쓰는 게 참 싫어서 난 어제 조현아 같다는 말에 이렇게 받아치고 싶었다.


난 아빠가 조양호 였으면 좋겠어.


그렇지만 꾹 참았다. 그렇게 말하는 건 너무 싸가지가 없는 것 같아서. 그건 진짜 상처일 것 같아서. 아무리 화나도 해서는 안될말이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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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
2014. 12. 6. 23:18

​​



측근님, 건배.
콘서트 갔다와서 기분도 거시기하고 다 좋은데
책이 재미없다는 게 함정.
전 노래 듣고 있습니다.
깊은 밤이에요.
전 에피톤과 심규선을 흥얼거립니다.

밤 잘 보냅시다, 토요일 밤.
건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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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
2014. 12. 3. 11:42

심지어 나조차도 요즘엔 둘째에게 자꾸 더 눈이 가고 있다. 힘겹게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를 보는 것이, 걷다가 엉덩방아를 찧고는 스스로 박수를 치는 것이 그렇게나 예쁘더란 말이다. 게다가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소리지르는 것은, 그 나이때의 애들만이 용서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모두의 시선이 둘째에게 가니, 나는 더더욱이 첫째에게로 향한 시선을 거두지 말아야지, 하다가도 이내 지치고 만다. 지금 첫째는 말을 엄청 잘하고, 간혹 징징대며, 모두의 관심이 자기에게 쏠리길 원한다. 굉장한 장난꾸러기인지라, 같이 있는 시간이 짧아도 지쳐버린다. 지치고 피곤해 간혹 나도 둘째에게로 시선을 두게 되는데, 그렇더라도, 외출할 때 내 손을 꼭 잡는 첫째의 손을 느끼면 또 엄청 좋다. 이 작은 손이, 나를 믿고 잡고 있다, 하는 생각에 가슴이 두둥실- 떠오르기도 하고, 제 엄마가 사주지 않겠다는 장난감들 앞에서 '그럼 이모한테 사달라고 할거야' 라고 거침없이 '이모는 사줄 거란' 확신을 갖는 것이 또 마냥 좋기도 하다. 그래도, 아주 잘 웃는 둘째가 자꾸 이뻐지는 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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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