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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4.11.26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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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4.11.18 선물
  7. 2014.11.17 크-
  8. 2014.11.16 에라이, 나도 모르겠다. 9
  9. 2014.11.13 캐릭터 2
  10. 2014.11.13 어떤 인터뷰
2014. 11. 27. 22:11

오리


이윤학




오리가 쑤시고 다니는 호수를 보고 있었지.
오리는 뭉툭한 부리로 호수를 쑤시고 있었지.
호수의 몸속 건더기를 집어삼키고 있었지.
나는 당신 마음을 쑤시고 있었지.
나는 당신 마음 위에 떠 있었지.
꼬리를 흔들며 갈퀴손으로
당신 마음을 긁어내고 있었지.
당신 마음이 너무 깊고 넓게 퍼져
나는 가보지 않은 데 더 많고
내 눈은 어두워 보지 못했지.
나는 마음 밖으로 나와 볼일을 보고
꼬리를 흔들며 뒤뚱거리며
당신 마음 위에 뜨곤 했었지.
나는 당신 마음 위에서 자지 못하고
수많은 갈대 사이에 있었지.
갈대가 흔드는 칼을 보았지.
칼이 꺾이는 걸 보았지.
내 날개는
당신을 떠나는 데만 사용되었지.




내 생의 중력(문학과 지성 시인선 400)

저자
홍정선 (엮음), 강계숙 (엮음)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주) | 2011-10-25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400호 발간을 맞은 첫, 시집 시리즈 33년간 이어온 한국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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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
2014. 11. 26. 11:32

'전전긍긍중이야' 라는 나의 말에 '그건 진짜란 뜻이야' 라고 J 가 말했다.

아- 진짜 너무 좋다. 행복해!


J 는 먼 데서 와인을 마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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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
2014. 11. 24. 17:16

연애 상담을 청해오는 사람들에게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도무지 상대방이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이다. 그럴 때는 항상 '뜻밖으로'만 도망치는 상대방보다도 '내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옳다고 믿는 자신을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 막상 상대방이 뜻대로만 움직여준다면 사랑은 결코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상대방에게서는 어떤 의외성도 어떤 매력도 느낄 수 없으니. 우리의 듯밖으로만 한사코 도망 치는 존재, 늘 짐작할 수 없는 곳으로 도망침으로써 '나'라는 소우주의 경계를 넓혀주는 타자가 바로 우리의 영혼을 뒤흔드는 존재,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이 끊임없이 나의 영토 바깥으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긴장감은 사랑의 '폐해'라기보다는 사랑의 '필수영양소'다. 붙잡으려 할수록 더 멀어지는 상대방을 향한 안타까움은 사랑을 무럭무럭 자라나게 한다.


누군가를 '붙잡으려 한다'는 행동 자체에는 근원적 폭력성이 잠재한다. 아무리 사랑하는 마음이 커도 그 마음이 내 곁에 그를 잡아두기 위한 것이라면 타자의 타자성은 죽어버린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에게 너무 많은 것을 원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폭력이 될 수 있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어?' 이런 감정이야말로 사랑을 '맞교환'으로 환원해버리는 분노의 본전계산법이다.

애초부터 사랑에는 '본전'이란 없다. 사랑은 매번 우리에게 '무(無)'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것을 요구한다. 매번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고 매번 보석 같은 깨달음을 얻어도, 다음 사랑 앞에서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우리는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상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란다. 사랑이 없을 때 불가능했던 모든 것이 이제는 가능해질 것이라 믿는다. 미국의 심리학자 로버트 존슨(Robert A. Johnson)은 말한다. "사랑은 신의 완전성을 상대방에게 투사하는 폭력이 될 수 있다"고.


로버트 존슨은 서로에게 '완전성'과 '절대성'을 요구하는 로맨틱 러브가 인간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만드는지를 지적한다. 사랑은 잠든 무의식의 저장고를 폭파하는 화약이 될 수 있다. 그 화약은 창조적 무의식을 실현하는 '뮤즈'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삶 자체를 파괴하는 치명적인 독약이 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나의 콤플렉스가 한없이 더 커지는 느낌이 들 때, 사랑은 맹독이 될 수 있다. 단지 사랑한다는 이유로 과거의 모든 것을 다 알아내려 혈안이 되어 있는 연인 앞에서, 사랑은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도 있다. 더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더더욱 서로를 상처 입히는 것, 그 끝나지 않는 상처교환의 악순환만이 지독한 사랑의 추억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타자의 타자성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타자를 타자인채로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정답은 없겠지만, 우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를 철회하는 것이다. '사랑의 완전성'과 '상대방의 완전성'에 대한 기대를 철회하는 것. 그리고 '나의 사랑'과 '너의 사랑'을 비교하는 작업을 끝장내는 것이다. 내 사랑에 비해 네 사랑이 얼마나 작은가를 매번 측정하는 일은 사랑 자체를 끝없는 서바이벌 게임으로 만들어버린다. 사랑에 푹 빠져 있으면서도 사랑으로부터 유체이탈할 수 있는 용기, 더없이 사랑하지만 사랑으로부터 담담히 거리를 둘 수 있는 여유야말로 '사랑에 빠진 당신'에게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렇다고 맹목적 사랑에 빠지지 않기 위해 너무 조심할 필요는 없다. 조심하고, 통제하고, 경계하는 것은 사랑과는 어울리지 않는 반낭만적 행태다. 아무리 실패한 사랑이라도 사랑은 자아에 매몰된 협소한 삶을 세상 바깥으로 끌어내어 우리 정신의 터전을 확장시킨다. 그런 열정과 그런 숭고함은 사랑 아닌 것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다. 그러니 두려움 없이 마음껏 사랑에 빠지자. 사랑에서 무언가 가시적인 성과를 얻으려 전전긍긍하지만 않는다면, 사랑은 자아를 확장하는 최고의 연금술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랑에 빠진 채 감정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것이 누구도 사랑하지 않은 채 꼿꼿한 자아를 고수하는 것보다는 백만 배쯤 낫다. 어떻게 평생 '나'와 더불어 오직 '나'로만 살 수 있겠는가. 사랑은 타자를 자아로 변신시키는 기술이 아니라, 나조차도 낯선 타자로 만드는 영혼의 마술이다. (p.49-52)





마음의 서재

저자
정여울 지음
출판사
천년의상상 | 2013-02-18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내가 사랑하는 책,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책 나만의 서재에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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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
2014. 11. 24. 11:54

오늘 R 이 링크를 보내줬는데, 루나파크의 루나가 '데미안 라이스'의 노래 i don't want to change you 의 가사를 번역한 포스팅이었다. 가사를 유심히 들을 수 있는 영어실력을 가졌다면 좋겠지만, 나는 그저 제목에 해당하는 가사만 들을 수 있는 사람. 당연히 번역도 못하고 있었는데, 루나가 번역해놓은 가사를 보니 참 좋구나. 특히나, 이 부분이 제일 마음에 든다.



 

 


 

I`ve never been with anyone

누구와도 함께해본 적이 없소.
In the way I`ve been with you

당신과 함께했던 것처럼.
But if love is not for fun

장난스레 하는 사랑이 아니라면
Then it`s doomed

스러질 운명이겠지.
Cause water races

물은 흐르기 마련이니까.
Water races down the waterfalls

폭포 아래로 쏟아져내릴 뿐이니까.
Water races

물은 흐르기 마련이니까.
Water races down the waterfall

폭포 아래로 쏟아져내릴 뿐이니까.



(출처: http://blog.naver.com/lunaparkblog/220188838062)

[출처] I don't want to change you|작성자 L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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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
2014. 11. 21. 17:22

어제 퇴근길이었다. 지하철 안에서는 책을 보는 대신, 스맛폰으로 영화 [비커밍 제인]을 보았다. 아주 좋은 장면, 그래서 아주 감동을 받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8호선 잠실역이었다. 순간 까매졌다. 기억이.



잠실?

내가 왜 잠실에 있지?

8호선이면 집에 가는 건 맞네?

어디로부터 와서 집에 가는거지?

나는 집에 가기 위해서 오금에서 타는데?

오금은 5호선인데?

그러면 나는 퇴근길이 아닌건가?

그럼 지금은 낮인가?

밤인가?



무서웠다. 내가 있는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언제인지도 모르는게 정말 무서웠다. 등뒤로 식은땀이 흘렀고, 내가 집으로 가는건지 조차도 확실하지 않으니 이런 게 기억이 안나는 게 아닌가 싶어,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생각하자, 생각하자. 자, 나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생각하자, 생각하자. 


잠실에서 8호선을 탄거라면 나는 잠실에서 내린거고, 잠실에서 내렸다면 나는 2호선을 탄거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2호선을 탔냐. 라고 차곡차곡 물어나가다가 아, 지금은 퇴근을 했고, 퇴근길이며, 나는 양재역에서 역삼역까지 40-50분 사이를 걸어왔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역삼에서 탔어! 생각이 나니 이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했던 그 잠깐의 시간 동안 너무 무서웠다. 며칠전에도 이랬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와락 겁이 났다. 나..알츠하이머인가?



초조해졌다. 신경정신과에 가서 알츠하이머인지 아닌지 일단 진단을 받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번도 신경정신과에 가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처음 가게 생겼구나. 급한 마음에 오늘 회사에 와서 양재동 근처 신경정신과를 검색해서 예약했다. 오전 열한시반으로 예약해놓고서는, 아, 알츠하이머라고 하면 어떡하지, 이거 기억을 점점 심하게 잃어가면서 죽는 거 아닌가,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알츠하이머는 다른 병과는 달리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가족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하는 수 없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연락을 끊어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구나, 생각은 저 멀리로 자꾸만 치달았고, 그럴수록 무서워서 울고 싶어졌다. 그렇게 병원을 찾았는데 내 차례가 오기 전까지 얼마나 두근두근하던지.



닥터를 만나 선생님, 저 알츠하이머인것 같아 무서워요, 라고 증상을 말했다. 그리고는 알츠하이머 초기 증상일 수 있을까요? 라고 물었더니 그럴 수도 있죠, 라고 대답하셨다. 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닥터가 질문했다. 최근에 머리를 다친 적이 있냐, 업무 하다가 자꾸 놓쳐서 혼이 나진 않느냐, 스트레스를 받았느냐 등등. 대화 도중 닥터는 내가 알츠하이머라기 보다는 해리성 증상을 보인 것 같다고 했다. 아, 그러면 괜찮은거냐고 하면서 더 대화를 이어가다가 그때 내가 스맛폰으로 영화를 보고 있었다는 얘기를 했고, 집중을 잘하는 편이라는 얘기도 했다. 그러자 지난번에도 한 번 그랬다고 했죠, 그때도 영화를 봤어요? 묻길래 아뇨, 그때는 음악을 듣다가 그랬어요, 라고 했다. 그러자 지하철 안에서만 영화를 봤어요 아니면 걸으면서 계단을 내려오면서도 영화를 봤어요? 라고 묻길래 걸으면서도 봤죠. 그러자 책도 그렇게 읽진 않죠? 라고 하길래 책 읽을 때도 재미있으면 계단 올라가면서도 봐요, 라고 했다. 그냥 걷는 시간은 아깝잖아요, 라고. 그러자 닥터는


이건 해리성도 아니네요, 라고 했다.



책 보고 영화 보고 이러는데 멀티태스킹이 안되서 너무 거기에다만 에너지를 쏟는 거에요. 알츠하이머는 지금의 정 반대방향에 있습니다. 알츠하이머는 걸으면서 책보고 영화보고 이런 걸 하지를 못해요. 했던 사람도 못하게 되죠, 라고 했다. 아 그래요? 그래도 나는 걱정이 되서 그렇다면 저는 어떡하면 되나요? 라고 물었고, 닥터는 걸을 때는 걷기에만 집중하라고 했다. 지하철을 타서 내릴때까지만 영화든 책이든 보고, 걸으면서는 그런 것들을 보지 말라고 했다. 그러다 큰일나요, 그러지마요, 라면서.



그런데요, 만약에 알츠하이머라면, 초기라면, 치료가 가능한가요? 라고 묻자 닥터는 네, 치료 가능해요, 라고 했다. 아...약간 안심이 됐어. 



그래서 이제 걸으면서는 책이나 영화 따위 안보는 걸로....




이렇게 하고 사무실로 돌아오니 맥이 탁 풀리고 진이 빠진다. 아무것도 못하겠더라. 그렇게 벌써 다섯시 반이 되어서, 오늘 페이퍼 열정적으로 쓸 생각으로 회사 왔는데 한 글자도 못썼다. 


무서운 하루였고, 아, 씨양, 술 마시고 싶어졌다.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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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
2014. 11. 18. 09:31


- 대만 다녀온 친구가 선물해준 위스키. 역시 선물중의 최고는 술선물이 아닌가 하노라. ㅋㅋㅋ 마침 위스키를 한 번 사마셔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잘됐다. 다음주에 여동생 가족이 올텐데 제부랑 같이 마셔야징 ㅋㅋㅋㅋㅋ

지난주말에 친구가 대만에 다녀왔는데, 가기전에 같이가자고 해서 엄청 갈등을 때렸더랬다. 비행기표 알아보고 부산을 떨다가, 아니다, 하고 말았는데, 말기를 잘한듯. 같이 갔으면 저 선물은 없었을테니. (응?) ㅎㅎ


- 금요일에 1박2일로 창원을 다녀온 후 토요일 오후에는 극장에 가서 [인터스텔라]를 보았다. 서울역에 내려서 영화 상영시간 전까지 극장에 도착하는 게 빠듯해 보여 바삐 움직였는데 다행히 상영시간이 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자판기에서 물을 뽑아 마시고자 했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어..잔돈이 없었어... 여튼 외박에다가 세시간짜리 영화를 보고나니 완전 녹초가 되었고, 백화점에 가 떨어진 화장품을 사고 집에 돌아가 샤워하고나니 아홉시가 넘어갔다. 너무 피곤했는데 진짜 너무 졸렸는데 남동생하고 너무 술이 마시고 싶어져서 언제 돌아오냐 문자를 보내니 열한시에서 열두시 사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래, 그렇다면 올때 술 사오면서 전화해라 너랑 꼭 술을 마실거다, 하고 나는 아홉시 좀 넘겨 잤다. 두 시간후로 알람을 맞춰놓고.

두 시간이 지나 알람이 울렸는데 와- 잠이 안깨 미치겠는거다. 그런데 남동생하고 술도 마시고 싶고. 때마침 남동생으로부터 전화도 왔다. 잠에 취한 내 목소리를 듣고서는 무슨 술이냐, 잠이나 자라, 하는거다. 아 안돼 나 너랑 마시고 싶어, 라고 하면서 나도 속으로는 '이상태로는 못마신다 자야한다' 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자 남동생은 자다 깨서 대체 왜 술을 마시는거냐, 그냥 자라, 한다. 그래서 나는 그래 잘게, 하고 다시 잤다. ㅋㅋㅋㅋㅋ 그러고 두시간후에 다시 깼는데, 이제는 좀 마실 수 있을 것 같은거다. 마침 아직 거실의 불도 들어와있고, 오호라 남동생이 혼자 술마시는구나 싶어 문을 열고 나가보니 아니나다를까 남동생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즐기고 있더라. 한 잔이라도 마셔야지 싶어 다가갔더니 다 마셨단다...한 잔도 없대.... 집에 소주와 와인은 있었지만 나는 맥주를 마시고 싶었던 터라...너무 서운했어..... 여튼 그러고 내 방에 들어왔는데, 아니 글쎄, 파리 한마리가 잉잉 거리다가 천장에 붙은 거다!


집에 왔을때부터 파리가 한마리 있길래, 아니 무슨 집구석에 파리가 있냐고 내가 버럭버럭 했는데 엄마랑 아빠가 배추 나르느라 문 한참 열어놨더니 그 때 들어왔는가보다 하셨더랬다. 그리고 무시하고 잤었는데, 그게 새벽에 잠이 깨 불을 켜니 내 방에 들어왔던 것. 나는 파리 보고 너무 짜증이 나서 남동생한테 


"야, 내 방에 파리 있어. 잡아줘." 


라고 했고, 남동생은 파리채를 가지고 내 방에 와서는 휙- 파리를 잡아줬다. 파리채에 죽은 파리 시체를 보고는, 잡아줬으니 시체 처리 정도는 할 수 있지 하며 파리채를 내게 내밀더라. 나는 기꺼이 처리했다. 킁킁. 분업사회. 분업 가족.


- 남동생이 혼자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시청하고 있던 티브이 프로그램은 [나는 자연인이다] 였다. 산속에 혼자 집짓고 생활해가는 독거인들을 찾아가 그들의 생활을 엿보는 프로그램인데, 나는 그 프로에서 전혀 재미를 찾을수 없던 터라 그걸 즐겨보는 게 너무 신기했다. 저거 재미있어? 물었더니, 응 너무 재미있어, 하는거다. 나는 [걸어서 세계속으로]가 더 재미있는데? 라고 했더니 자기는 그건 관심도 없다는 거다. 너 그럼 저렇게 살고 싶어? 산속에서? 그랬더니 그건 아니란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은데 저 프로는 참 재미있다고.. 그게 너무 신기했다.

다음날 일자산에 같이 가는데 남동생이 '주말 밤에 술 마시면서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보는 시간이 너무 행복하다' 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얘가 언제 자신이 행복한지를 알아서 다행이라고. 그리고 그게 너무나 좋다고. 나는 자신이 언제 슬픈지, 언제 스트레스를 받는지, 언제 행복한지를 아는 사람들이 정말 좋다. 그리고 그래야한다고 생각한다.



- 어제 정식이가 '너희 남매들은 어릴때부터 그렇게 사이가 좋았냐' 라고 물었다. 그저 다른 집 형제들은 어떻게 사는지 단순한 호기심에 물었던 질문인데, 나는 고등학교때는 더러 싸운 적도 있지만 좋다고 답하면서 '그건 아마도 우리 삼남매가 어릴때부터 우리끼리 있었기 때문' 이라고 덧붙였다. 우리가 어릴적에 아빠 엄마는 모두 돈벌러 나가셨고, 우리가 간식 사 먹을 돈을 남겨둔 채로 아침에 나가 저녁에 들어오셨더랬다. 그 사이에 우리는 학교를 다녀오고, 밥을 차려먹고, 학원을 다니고, 놀고 했다. 그때가 내가 초딩이었을 때니 나와 다섯살 차이가 나는 남동생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이 생활이 시작됐던 셈이다. 아마도 그런 것들이 좀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여동생과 나는 남동생을 되게 애틋해했던 것 같다. 물론 남동생과도 어릴때 많이 싸웠지만, 나는 대학 들어가서 알바를 하면서부터 남동생이 수학여행을 간다거나 하면 용돈을 챙겨주고는 했다. 우리가 우리끼리 더 돈독할 수 있고, 주변 누구나 다 부러워할 수 있는 우애를 가진 남매가 된 건, 어린 시절을 그렇게 함께 보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지는 거다. 언젠가 얘기했지만, 나는 초등학교 6학년때 1학년 남동생 교실의 가 학부모 청소를 대신 해준적도 있다. 엄마가 돈 벌러 간다고 해서..

어제 이런 얘기들을 정식이랑 하다가 불현듯 아! 하고 깨달음이 왔다.


나는 어린시절 성폭력에 노출됐었고, 그것이 부모님이 우리만 남겨두고 돈을 벌러 나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24시간 부모님이 붙어 있을 수도 없으니 꼭 없었기 때문이라고만 볼 수는 없겠지만, 여튼 그런식의 원망을 나름대로 갖고 살아왔다. 그런데 어제 정식이랑 여동생 남동생에 대한 얘기를 하노라니, 그것 역시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만들어진게 아닌가 싶어지는거다. 나는 그 시절에 어떤 커다란 상처 하나를 받게 되었지만, 반면 그 시절을 보내면서 보석같은 동생들을 갖게 되지 않았나. 이것과 저것을 퉁치자는 것도 아니고, 또 퉁칠수도 없는 성질의 것이지만, 나에게는 무엇보다 내 동생들이 소중하다.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도 아주 큰 존재임을 스스로도 느끼고 있다. 내 여동생은 지금까지도 가장 좋은 일이 있을 때, 그리고 가장 속상한 일이 있을 때, 내게 전화를 하고,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펑펑 소리내서 운다. 내가 아무말을 하지 않아도, 내 목소리만 들어도 그저 눈물을 흘릴 수 있는거다. 나는 나의 동생들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 편임을 믿고, 내 동생들 역시 내가 그렇게 해줄 거라는 걸 안다. 이렇게 든든한 형제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 그런 시절을 보낼 수 있어서였다면, 여기에 더 힘을 실어 내가 내 상처를 극복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다. 살면서 정말 내 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단 한 명도 얻기 힘든데, 심지어 가족들조차 등지게 되는 경우도 허다한데, 나는 여동생과 남동생이라는 아주 든든한 아군이 있다. 



- 일기가 길어지는데, 그러자 어린 시절 남동생과 교회에 갔던 일이 떠올랐다. 내가 초등학교 2-3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하니 아마도 남동생은 5-6살이었을 거다. 동네에 작은 교회 집사님인가 하는 아주머니가 있었고, 그 아주머니도 우리랑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있어서 한 날은 동네 아이들을 다 데리고 교회를 갔다. 작은 교회였고, 그래서 앞에서 설교나 예배 진행을 그 아주머니가 하셨었는데, 어린 나의 남동생이 떠들자, 그 여자가 내 남동생을 교회 뒷문에 나가 서있으라며 벌을 준거다. 그 여자는 어른이었고, 나는 그저 묵묵히 남동생이 뒤에서 벌 서는 걸 뒤돌아 보고는 다시 예배를 드렸는데, 잠시후에 돌아보니 남동생이 그 자리에 없었다. 지금이었다면 내가 당장 자리를 박차고 가 그 어린 아이가 어디로 갔는지, 집에 갔는지, 갔다면 제대로 갔는지를 확인하고 싶어 했을텐데, 그때는 그저 예배가 끝나길 기다렸다. 집에 가니 다행스럽게도 남동생이 있었고, 엄마는 내게 한마디 하셨다. 쟤가 오다가 길이라도 잃어버렸으면 어쩔뻔 했냐고. 이게 되게 나한테 오래 남았는데, 지금 오히려 그때보다 더 겁나는거다. 그때 쟤를 잃었다면 나는 대체 어떻게 살고 있을까. 왜 나는 그렇게밖에 행동하지 못했을까. 내가 조금만 더 컸어도 걔를 그렇게 뒷문에 혼자 세우는 걸 반대했을 거고, 데리고 집으로 갔을텐데.

초등학교 6학년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나는 당시 피아노 반주를 하고 있었고 그래서 성가대 연습을 하던 중이었는데, 성가대이던 여동생의 볼에 성가대 지휘자 집사님이(아저씨다) 뽀뽀를 한거다. 여동생은 그게 싫어서 완전 화를 내면서 울었고,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내 여동생 성가대 가운을 벗기고 가방을 챙겨준 뒤에 교회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집에 가. 연습하지마, 집에 가, 라고. 개새끼.. 내가 성가대 일원이었으면 같이 갔을텐데 나는 반주자라 연습을 마저 해야했다. 연습이 끝나고 집사님이 불렀다. 너 어떻게 그렇게 싸가지 없게 행동하냐는 뉘앙스로 나한테 뭐라고 했다. 화를 심하게 내거나 한 건 아닌데, 니가 그렇게 애들 앞에서 동생을 보내버리면 어떡하냐고 하는거다. 나는 집사님은 애정표현이 너무 지나치시다, 싫으니까 하지 말라, 고 했다. 그러자 집사님은 안그러겠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개새끼네. 여튼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어릴적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교회에서 상처를 되게 많이 받은 것 같다. 



- 아 남동생이 파리 잡아준 거 쓸려고 했던건데 왜 이야기가 여기까지 왔지. 할 수없지.


- 남동생이 [나는 자연인이다]를 좋아하는 만큼 나는 [걸어서 세계속으로]를 즐겨보지 않는다. 그 프로가 그만큼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 재미 없어서가 아니라, 나는 결정적으로 티브이를 볼 시간이 별로 없다. 다른 사람들은 언제 그렇게 티브이를 보는지?? 남동생이 그 프로의 어디에 꽂혀서 그렇게나 보는지 모르겠는데, 어쩌면 내가 음식 사진에 꽂히는 것과 비슷한게 아닌가 싶다. 커밍아웃을 하자면, 나는 알라딘의 블로거중에 한명인 ㅎ를 싫어하는데-그사람의 글도 싫고, 자기 삶이 맞다고 주장하는 것도 싫다- 그 사람이 올리는 밥상 사진만큼은 꼬박꼬박 챙겨본다. 누군가의 밥상을 들여다보는 게 나는, 그 반찬의 종류와 상관없이 왜이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다른이의 밥상을 보고 술상을 보는 일은 너무나 즐겁다. 실제로 ㅎ 가 올리는 밥상 사진의 메뉴는 그다지 내 취향의 것들이 없는데도, 그 가득한 풀반찬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아- 나는 진짜 음식 사진 좋아하는 것 같아 ㅠㅠ 

그러고보면 [걸어서 세계속으로]를 좋아하는 이유도, 다른 나라의 음식을 볼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다른 나라의 밥상을 엿볼 수 있어서 인듯. 실제로 그 프로를 보는데 음식 사진이 안나오면 나는 입밖으로 소리내어 말하는거다. 아, 뭐 먹는지 보여달라고! 막 이렇게 ㅋㅋㅋㅋㅋ그리고 식당에서 사먹는 음식 사진보다 자기가 차린 밥상을 보는 게 더 좋다. ㅋㅋㅋㅋㅋ 내가 밥상을 잘 차릴 수 없어서 그런건지 요리에 병신이라 그런건지, 그냥 아주 서툰 요리라 해도, 야채만 씻어 올려둔 사진이어도 막 좋아좋아 하게되는 듯. 



- 남동생이 일요일에 아빠한테 그랬다. "아빠도 산에 가서 혼자 살어. 일주일에 한번씩 반찬 챙겨다 줄게." ㅋㅋㅋㅋㅋㅋㅋ그러자 엄마와 내가 모두 좋아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오늘 출근해서 하루종일 이거나 쓰고 앉았었네..이제 점심시간이야..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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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
2014. 11. 17. 08:48

4월

내가 기차같이 별자리같이
느껴질 때
슬며시 잡은 빈손을 놓았다.


누군가 속삭였다. 어쩔 수 없을
거라고. 귀를 막은 나는
녹슨 피 속으로 가라앉으면서
너의
여러 얼굴들을 되뇌었다.


벚꽃 움트는 밤 아래
무릎 꿇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낙타와의 장거리 경주

저자
이응준 지음
출판사
세계사 | 2002-06-2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소설이전 혹은 소설이외 혹은 소설 그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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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
2014. 11. 16. 23:34

쑨젠신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야 그 오래된 사진들을 들춰보니 쑨젠신과 함께 있을 때면 징치우는 항상 들떠 판단력이나 자제력이 모두 흐려져 있었다. 징치우에게 쑨젠신은 거센 바람과 같았다. 거세게 불어오는 그에게 휩쓸려 사고와 청각은 둔해지고 웃음의 감각만 예민해져 있었다. 물론 아주 바보 같은 웃음이었다. (p.117-118)

 

 


산사나무 아래

저자
아이미 지음
출판사
포레 | 2013-04-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산사나무 아래』는 문화대혁명이 막바지로 치닫던 1970년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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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조민기'랑 '오연수'가 주연한 드라마 [거침없는 사랑]에서 오연수가 조민기에게 그런 말을 했더랬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라고 생각했는데 그 바위가 움직일 줄은 몰랐다'고. 스물다섯에 나도 그랬다. 꼼짝도 안할거라 생각해서 마음껏 까불었는데 그가 완전히 너무 꼼짝을 해가지고.. 어쨌든 우리는 만났고 만나는 동안에는 너무 좋아서 터져버릴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졌으며 모든 뜨거운 연애가 그렇듯이 결국 나는 나의 바닥을 만났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나중에 알고서 아, 내가 이렇게까지 밑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구나, 라는 걸 깨닫고 얼마나 내가 내 자신에게 실망하고 부끄럽던지..

 

그 사랑은 결정적으로 나중에 돌아봤을 때 '나쁜 사랑' 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지만, 그 연애가 그 후의 연애에 영향을 미쳤지만, 그렇다해도 아마 '그 시절로 돌려놓으면' 나는 또다시 그 사람을 좋아할 거란 생각을 했다. (나중에 만났다면 좋아하지 않았을 거 같다. 사랑은 타이밍인지도.)

 

어쨌든 그 후에 나는 안정적이고 평안한 연애를 했다. 아, 그래 모름지기 연애란 이런 것이어야 해, 라고 생각했다. 나는 연애가 내 일상의 중심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고 언제나 주변에 있기를 원했다. 나를 구성하는 많은 것들 중의 하나여야지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주체는 나여야만 했고, 모든건 다 내 의지에 의해 결정되어져야 했다. 내가 주는 거리만큼만 상대가 다가와야했고 조금이라도 더 올라치면 '아니' 라고 말했다. 그리고 모두들 그 뜻에 따라주었고, 그랬으므로 지속이 됐었다. 나는 연애로 인해 나 자신을 잃고 싶지 않았고, 그것이 내가 연애에 있어서 바라는 모든 것이었다.

 

그 상황에 맞게 그 상대들을 충실하게 좋아했다. 어떤 장점들에 이끌리고 어떤 편안함에 이끌렸다. 때로 어떤 단점들에 눈을 감으면서 관계를 지속했고 그 상황에서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을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그 관계가 주는 안정감과 평안함을 나는 선택했고, 만족했다. 그리고 내가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연애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내가 추구하는 바였으니까.

 

 

그렇지만,

 

사람일은 십 초 뒤도 내다 볼 수 없고, 미래란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이라고 했던가.

 

 

이 영상을 보냈더니,

 

 

 

 

그는 이 영상으로 답했다.

 

 

 

 

 

 

일상은 흐트러지고 뒤로 밀려났다. 평안함은 온데간데 없고 온갖 감정이 하루에도 스무번씩 들어왔다 나갔다가 한다. 머리를 쥐어뜯고 벽에다 쿵쿵 찧기도 한다. 혼자 큭큭대고 웃었다가 한숨을 쉰다. 다시는 내 바닥을 들여다보는 지경까지 가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또 바닥을 만날까봐 두렵다. 매일이 매시간이 두려움과 흥분으로 설레임과 긴장감으로 초조함과 예민함으로 즐거움과 당황으로 왔다갔다한다. 하루에도 서른번씩 이런걸 그만두어야 한다고 내 자신에게 말하다가, 그보다 더 많은 횟수로 그만두기에는 이게 너무 크다고 혼자 말한다. 나를 잃지 않으려면 꼿꼿하게 여기서 빠져 나와야 한다고 했다가, 나라는 게 대체 무엇이길래 그래야한단 말인가 갈등을 반복한다. 도망치고 싶다고 혼자 끙끙대다가 도망치면 이 사람을 잃을 거란 두려움에 이내 포기한다. 왜 애를 써야 하는거냐고 친구들에게 되물었던 게 언제였던가, 나는 애를 써야 한다는 걸 이제서야 깨닫는다. 제대로 말도 못하고 판단도 못하는 초병신이 되어서 매시간을 산다. 똑똑하고 차갑고 냉정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그저 내가 만든 이미지에 불과했구나. 나는 그냥, 초병신이야. '항상 들떠 판단력이나 자제력이 모두 흐려져 있'고, '사고와 청각은 둔해지고 웃음의 감각만 예민해져 있'다.

 

 

억누르지 말고 요동치는 대로 두라는 그의 말에, 그래 될대로 되라지, 하는 심정이 되었다가 이내 떠올랐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바로 그때도 내가 '될대로 되라지' 했던 것을. 에라이, 나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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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는지 물어봐도 되니?"
"공개 법정에서 저한테 불리한 증언을 하셨잖아요. 그동안 우리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얘기도 나누지 않았어요. 그 문제는 처리를 하고 넘어가야 될 것 같아요. 어머니는 거기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지 않으실 거예요." (p.280)




다운 리버

저자
존 하트 지음
출판사
노블마인 | 2012-02-03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이 한 권의 책으로 스릴러는 문학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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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문제는 처리를 하고 넘어가야 될 것 같아요, 라는 애덤의 말이 좋았다. 애덤은 뭐 그렇게까지 좋진 않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를 짚고 넘어가는 건 좀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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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13. 09:36

어제 트위터를 통해 한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다. 내 글을 봤다며 아버지를 인터뷰 하고 싶다는 거였다. 원한다면 모자이크 처리나 음성변조를 할 거라며, 감정 노동에 대한 인터뷰를 해줄 수 있겠느냐 묻더라. 나는 당연히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그래도 혹시 몰라 아버지께 여쭤보고 알려드리겠다 했다. 내가 그동안 봐 온 아버지는 그런 걸 할 리 없는 분이니까. 그 방송은 아마도 고발 방송 쯤이 될텐데, 거기에 나서서 인터뷰를 할 분이 아니시다. 그래서 어제 집에 돌아가 여쭤보았더니, 당연하게도 '아니'라고 대답하셨다. 아빠는, 조만간 다시 경비 일을 시작하실 건데, 아무리 모자이크 처리한다고 해도 그것이 앞으로의 구직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하셨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렇다. 그리고 그걸 떠나서도, 아빠는, 앞에 나서는 걸 무엇보다 꺼려하는 분이시다. 그래서 나는 오늘 그 방송국에 연락을 했다. 유감스럽게도 아버지는 하지않겠다 하셨다, 고.



씁쓸했다. 나와 내 아버지의 자리는 여기구나, 하는 생각 때문에. 

인터뷰 요청이라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자랑스러움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할텐데, 나에게 혹은 나의 아버지에게는 사회의 부당함, 약자의 입장을 대변하라고 하다니. 그것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이미 알고 있던 내가 자리한 위치가 와닿았다고 해야할까. 물론 나는 오피니언 리더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연예인이 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유명해지고 싶다거나 이름을 떨치고 싶다거나 한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약자이고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는 쪽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이 씁쓸했다. 어차피 이 사회에서 내 자리는 여기구나, 하는. 나는 감정 노동이 힘들고 부당하며 부조리하다, 고 대변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인, 그런 사람의 딸이구나. 


아, 뭐 그렇다고 우울하다거나 한 건 아니고, 그저 순간 그런 기분이 들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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