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3. 08:11


<연극이 끝나기 전에>


마치 즐겨 읽던 희곡의 주인공처럼 
그대가 내게 왔죠 마치 새벽녘처럼 
나는 다음 할 말을 잊어버린 배우처럼 
아무 말도 못 하죠 마치 벙어리처럼 

어느 날 그대가 나에게 왔고 
나는 갑자기 무대 위로 끌어 올려졌어요 
그대를 만나기 전에 무엇을 사랑했는지 
생각나지 않아요 
그리고 여전히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고 
아직 믿고 있는걸 
하지만 영원히 자신을 속일 수는 없으니 
이제 돌아와줘요 
연극이 끝나기 전에 

흐릿하게 비추던 구름 속의 달빛처럼 
그대가 내게 왔죠 마치 메아리처럼 

인정할게 그 때 
먼지처럼 쌓이는 매일에 지쳐가고 있었다고 
어쩌면 
이미 오래 전부터 나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 

어느 날 그대가 나에게 왔고 
나는 갑자기 무대 위로 끌어 올려졌어요 
그대를 만나기 전에 무엇을 사랑했는지 
생각나지 않아요 
그리고 여전히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고 
아직 믿고 있는 걸 
하지만 영원히 자신을 속일 수는 없으니 
이제 돌아와줘요 

그대가 마지막 말을 할까 봐 
기어이 그 말을 내게 할까 봐 
차라리 듣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 연극에서 

그래도 여전히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고 
아직 믿고 있는 걸 
하지만 영원히 자신을 속일 수는 없으니 
이제 돌아와줘요 
연극이 끝나기 전에 
연극이 끝나기 전에 
연극이 끝나기 전에


https://youtu.be/lqVE1JdniL8



심규선의 노래를 즐겨 들었지만 모든 곡을 다 좋아하진 않았다. 그러다 이 노래의 가사가 나중에 들렸다. 

'그대를 만나기 전에 무엇을 사랑했는지 생각나지 않아요'


아, 심규선 콘서트 가고싶다.




'사랑의 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슬픔  (2) 2015.08.30
그녀에겐 삶의 필수 영역  (0) 2015.08.28
그들은 좀전까지 얼마나 뜨거운 연인들이었던가.  (4) 2015.04.07
연애란, 둘이 하는 것  (0) 2015.02.11
I thought it might fix things.  (0) 2015.02.10
Posted by ssabine
2015. 4. 7. 17:37


01:48

-나 아직 깨어 있어. 자긴?

02:03

-자긴 나랑 놀고 싶지 않은 모양?

02:20

-아무 때라도 좋으니 대답해줘. 걱정돼서 그래.

02:51

-별일 없는지만 알려줘. 아니면 나 잠 못 자.

03:03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왜 대답 안 해? (p.274-275)




"화가 나서가 아니야. 그냥 수천 개씩 쏟아지는 문자 폭격 같은건 받고 싶지 않을 뿐이야. 내가 답이 없으면 그건 그 순간에 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야.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중에 문자나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면 그때 연락하면 되는 거지, 그렇게 한꺼번에 수백 개씩 보낼 필요는 없는 거 아니겠어?"

"미안해, 걱정이 돼서 그랬어. 갑자기 그렇게 사라져버리니까.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하고..."

"아니, 도대체 뭘 걱정한 건데?내가 자기한테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고 얘기해줬고 파티에 간다고까지 얘기했었는데."

"그냥 오케이라고만 보내줬으면 됐을 거 아냐. 나중에 통화하자고 한마디만 해주면 되는 걸 가지고...그게 그렇게 힘든 일이야? 그렇게 사라지는 대신 그냥 버튼 한 번만 누르면 되는 거였잖아."

"난 사라진 적 없어. 그냥 누가 나를 그렇게 몰아세우는 게 익숙하지 않을 뿐이야." (p.278)



-나 여기 왔어.

5분도 안 돼서 전화가 걸려 왔다.

"여기라니, 어디?"

"여기. 바 이름이....'로마'네. 커피 한잔 하고 있어."

침묵이 흘렀다.

"예상 못 했던 모양이지?"

"그래, 데리러 갈게. 5분만 기다려." 

(중략)

조금도 변하지 않는 무뚝뚝한 표정 그대로 그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내게 말했다.

"왜 온 거야?"

가슴팍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히는 질문이었다. 나는 솔직하기로 마음먹었다.

"보고 싶었어."

"출발하기 전에 왜 말 안 했어?"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p.300-301)





아침의 첫 햇살

저자
#{for:author::2}, 아침의 첫 햇살#{/for:author} 지음
출판사
소담출판사 | 2014-03-13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아마존 8주 연속 1위, 70만 부 판매 돌파 여성 독자들의 폭...
가격비교


'사랑의 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녀에겐 삶의 필수 영역  (0) 2015.08.28
연극이 끝나기 전에  (0) 2015.07.03
연애란, 둘이 하는 것  (0) 2015.02.11
I thought it might fix things.  (0) 2015.02.10
당신의 첫,  (0) 2015.01.14
Posted by ssabine
2015. 2. 11. 10:48

시오리코 씨가 돌아보며 눈부신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산너머에 있는 아득한 바다를 바라보듯이.

"무서웠어요 ‥‥‥. 나도 언젠가 어머니처럼 멀리 떠날지도 모른다, 당신을 홀로 남겨둘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생각 때문에 답을 미루기만 했어요 ‥‥‥."

"네? 왜 날 두고 떠난다는 겁니까?"

어머니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모르지만 왜 그런 일로 고민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데리고 떠난다면 몰라도. 그게 아니라면 이미 내 마음은 정해져있다.

"네? 다이스케 군도 알잖아요, 우리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10년 전에 홀연히 떠난 뒤로 얼마 전까지 연락조차  ‥‥‥."

"그게 아니라, 나도 같이 가면 되잖아요."

그녀는 놀란 듯 입을 떡 벌렸다. 이토록 멍한 표정을 짓는 건 처음봤다.

내 말이 그렇게 이상했나? 아니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건가?

나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시오리코 씨가 쫓고 싶을 만큼 재밌는 일이라면 나한테도 분명 재밌는 일일 겁니다. 그리고 어디 있어도 어차피 고서점을 할 거잖아요. 그럼 일손이 필요할 테고, 나도 공부가 되니가 좋고. ‥‥‥ 그럼 안 됩니까?"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했지만 반응이 없는 걸 보니 걱정이 됐다.

"아, 뭐, 아무것도 모르는 나 같은 놈하고는 같이 갈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 꼭 따라가겠다는 게 아니라, 뭐랄까, 시오리카 싫지 않으면  ‥‥‥."

순간 시오리코 씨는 지팡이를 짚지 않은 쪽 손을 나에게 뻗었다. 그녀의 손이 내 앞치마를 붙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 당겼다. 그리고 자신도 몸을 내밀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싫기는요  ‥‥‥. 그럴 리 없잖아요  ‥‥‥." (p.302-304)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5: 시오리코 씨와 인연이 이어질 때

저자
미카미 엔 지음
출판사
디앤씨미디어 | 2014-07-23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경이로운 밀리온셀러, 일본 550만부 돌파! ‘비블리아 고서당’...
가격비교



뭔가 좋으면서 싫다. 나는 나만 생각하는데, 우리가 둘이기 때문에 다른 방법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좋고, 그런데 그때도 과연 둘이 가는게 좋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좋다.

Posted by ssabine
2015. 2. 10. 10:03

“But you don’t wear an engagement ring.” “I don’t have one.” He studied the bangle, turning it slowly around. “What kind of man proposes without a ring?” She explained, then, that there had not been a proposal, that she hardly knew Navin. She was looking away, at a dried-out plant on the terrace, but she felt his eyes on her, intrigued, unafraid. “Then why are you marrying him?” She told him the truth, a truth she had not told anybody. “I thought it might fix things.”  -「GO ASHORE」P. 313







Unaccustomed Earth

저자
Lahiri, Jhumpa/ / 지음
출판사
Random House | 2009-04-01 출간
카테고리
문학/만화
책소개
These eight stories by beloved and ...
가격비교




내게도 정확히 저랬던 때가 있었다.

나중에 생각나면 번역본에서 옮겨와야 겠다. 내가 본 건 번역본이었으니까.

Posted by ssabine
2015. 1. 14. 10:26

첫 

 

내가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당신의 첫,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그건 내가 모르지.
당신의 잠든 얼굴 속에서 슬며시 스며 나오는 당신의 첫.
당신이 여기 올 때 거기에서 가져온 것. 
나는 당신의 첫을 끊어버리고 싶어.
나는 당신의 얼굴, 그 속의 무엇을 질투하지?
무엇이 무엇인데? 그건 나도 모르지.
아마도 당신을 만든 당신 어머니의 첫 젖 같은 것.
그런 성분으로 만들어진 당신의 첫. 

 

당신은 사진첩을 열고 당신의 첫을 본다. 아마도
사진 속 첫이 당신을 생각한다. 생각한다고 생각한
다. 당신의 사랑하는 첫은 사진 속에 숨어 있는데,
당신의 손목은 이제 컴퓨터 자판의 벌판 위로 기차를
띄우고 첫, 첫, 첫, 첫, 기차의 칸칸을 더듬는다. 당
신의 첫. 어디에 숨어 있을까? 그 옛날 당신 몸속으
로 뿜어지던 엄마 젖으로 만든 수증기처럼 수줍고 더
운 첫. 뭉클뭉클 전율하며 당신 몸이 되던 첫. 첫을
만난 당신에겐 노을 속으로 기러기 때 지나갈 때 같
은 간지러움. 지금 당신이 나에게 작별의 편지를 쓰
고 있으므로, 당신의 첫은 살며시 웃고 있을까? 사진
속에서 더 열심히 당신을 생각하고 있을까? 엄마 뱃
속에 몸을 웅크리고 매달려 가던 당신의 무서운 첫
고독이여. 그 고독을 나누어 먹던 첫사랑이여. 세상
의 모든 첫 가슴엔 칼이 들어 있다. 첫처럼 매정한
것이 또 있을까. 첫은 항상 잘라버린다. 첫은 항상
죽는다. 첫이라고 부르는 순간 죽는다. 첫이 끊고 달
아난 당신의 입술 한 점. 첫. 첫. 첫. 첫.  자판의 레
일 위를 몸도 없이 혼자 달려가는 당신의 손목 두 개,
당신의 첫과 당신. 뿌연 달밤에 모가지가 두 개인 개
한 마리가 울부짖으며, 달려가며 찾고 있는 것, 잊어
버린 줄도 모르면서 잊어버린 것. 죽었다. 당신의 첫
은 죽었다. 당신의 관자놀이에 아직도 파닥이는 첫. 

 

당신의 첫, 나의 첫,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첫.
오늘 밤 처음 만난 것처럼 당신에게 다가가서
나는 첫을 잃었어요 당신도 그런가요 그럼 손 잡
고 뽀뽀라도?
그렇게 말할까요? 

 

그리고 그때 당신의 첫은 끝, 꽃, 꺼억.
죽었다. 주 긋 다. 주깄다.
그렇게 말해줄까요? 




당신의 첫

저자
김혜순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08-03-28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김혜순의 아홉 번째 시집『당신의 첫』. 시인은 80년대 이후 한...
가격비교


테레자 같다.




Posted by ssabine
2015. 1. 9. 17:45

벚꽃이 달아난다



그는 나를 앞에 두고 옆사람과 너무 화사하다

이편 그늘까지 화사하구나

죽방렴 사이를 빠져나가는 한 마리 멸치처럼

빠른 내 그늘을 눈치채지 못한다

나무둥치라 여긴 내 중심은 자주 거무스름하다

임산부가 행복하다면 가뜩 낀 기미는 말할 수 없었던

속내일까



덜컹거리며 꽃길 백 리,

어쩌자고 화염길 천 리,



나는 역방향에 앉아서

그가 다 보고 난 풍경을 

뒤늦게 훑는다



그 자리 그대로인데

풍경은 왜 놀란 듯 달아나고 있는지



벚꽃은 제가 절정인 줄 모르고

절정은 또한 제 시절을 모르고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저자
이규리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4-05-1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시인의 말어떤 그림 속의 도마뱀은 그림에서 나와 다시 그림으로 ...
가격비교


'사랑의 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I thought it might fix things.  (0) 2015.02.10
당신의 첫,  (0) 2015.01.14
나는 가장 아름답게 생을 탕진하는 중이다.  (8) 2014.12.22
본연의 나  (0) 2014.12.18
오리  (0) 2014.11.27
Posted by ssabine
2014. 12. 22. 18:01

사흘 뒤

제목 없음


안녕, 에미. 당신도 방금 창밖 내다봤어요? 유령이라도 나올 것 같지 않아요? 우박폭풍이 몰아치는 걸 보면 꼭 지구 종말을 알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늘에 이상한 황갈색 막이 드리우더니 난데없이 거기에 시커먼 커튼이 펼쳐지고, 곧이어 수천수만 개의 하얀 자갈이 어마엉마한 속도로 쏟아지는군요. 그 영화 제목이 뭐였더라? 거북인지 개구린지 닭인지가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영화 있잖아요. 혹시 알아요? 잘 있어요. 레오. (p.213)



개구리가 내리는 영화는 매그놀리아, 라고 그가 불쑥 말했고 새벽 세시를 안주삼아 잭콕을 마시고 있던 그인지라 새벽 세시에 그 얘기가 나오는가보구나 했는데 나로서는 전혀 기억나질 않았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와, 낯선 곳 낯선 상황에 두려웠던 마음을 달래며 그런데 그게 새벽 세시에 나오는 구절이더냐, 했더니 그렇다고 했다. 나는 현재 책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읽어달라 했고, 그 새벽, 전화기 너머에서 그는 이 구절을 읽어주었다.


아, 이런 문장이 있었네, 레오가 이랬네, 하던 것보다 더 먼저 

아, 참 좋구나, 했다.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책을 읽어주는 것, 말이다.

낯선 두려움 속에 떨다 집으로 돌아와 내 방 내 침대에서 포근하게 이불을 덮고 좋아하는 사람이 읽어주는 책을 가만히 듣고 있는 새벽. 심지어 그 책은 내가 좋아하는 책. 이 모든게 너무 좋아서 히죽히죽 웃음이 나왔다. 행복하다고도 생각했다.


조금만 더 읽어줘요 라고 했던가, 그 다음도 읽어줘요 라고 했던가. 나는 이 상황과 이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터. 그는 계속 읽어준다.


1시간 30분 뒤

Re:


동물농장. 개구리 왕.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레오, 사흘 동안이나 아무 소식도 없다가 기껏 이런 생뚱맞은 동물 애니메이션 이메일로 저를 어이없이 만들어야겠어요? 다른 수신자를 찾아 보시죠. 저는 거의 반 년 동안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당신에게 성실하지 못했어요. 당신과 날마다 많은 시간을 여기서 보내지 못했죠. 그 결과 우리가 급기야 폭우나 하늘은 덮은 황갈색 막에 대해 얘기하게 되기에 이르렀군요. 저에게 당신 얘길 하고 싶으면 하세요. 저에 대해 알고 싶은 게 있거든 물으시구요. 하지만 여기서 날시 얘기를 하는 건 어울리지 않아요. 당신 눈에 갑자기 우박만 보이도록 미아가 당신 고개를 돌려놓았나요?

미아 얘기 나온 김에 몇 가지 더 물을게요. 혹시 미아더러 당신과의 만남에 대해 아무 얘기도 말라고 하셨어요? 사춘기 아이들처럼 자기들끼리만 대단한 비밀이라도 있는 양 쉬쉬 하다니, 대체 이 무슨 유치한 장난인가요? 레오, 솔직히 말하면 당신과 더 얘기할 마음이 없어졌어요. 안녕히 계세요. 에미. (p.214)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저자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08-04-1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사랑이 이메일을 타고 오다! 매혹적이고 재치 있는 독일 장편소설...
가격비교








다음날엔, 내가 그에게 읽어준다. 새벽 세시를 읽어주고 싶었지만 내가 현재 가지고 있지 않았고, 나는 어떤 책을 읽어줄까, 하고 생각하다 전화기를 들고 가 내가 좋아하는 책들만 가지런히 꽂힌 책장 앞으로 간다. 줌파 라히리와 올리브 키터리지가 보인다. 그것들 중 한 권을 꺼내려다가(지옥-천국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떡- 하니 자리한, 사랑의 미래를 꺼내든다. 아, 이렇게 맞춤한 책이.



그가 선물한 책이다.




그는 그녀를 2인층으로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은 그와 그녀가 은밀한 2인 공동체를 결성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나'와 '너'만의 성채 속에서, 두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채, 완전한 소통을 이루었던 것이다. 둘만의 작은 공간에서 깊게 흔들리는 눈을 들여다보고 '너'라는 이름을 부르거나, 한 사람만을 위한 은밀한 언어들을 메일로 보낼 때, 그들은 완벽하게 세상과는 절연된 2인의 왕국을 만들어낸 것 같았다.


어느 환한 봄날의 꽃그늘 아래서, 그가 지상에서 가장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을 때, 다만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그 시간은 완벽했다. 그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시간은 모든 모욕을 잊어버리고 조용히 닫혔다. '너'를 부르는 것 자체가 이미 어떤 간절한 전언을 머금고 있었다.


2인칭은 주술의 호명이다. 한 사람이 누군가를 2인칭으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은, 당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 '당신' '그대'라고 호명할 때, 2인칭은 언제나 지금 현전하는 것을 대상으로 한다. '내'가 부를 때, '당신'은 내 눈앞에 있어야만 한다. 혹은 '내' 목소리를 당신이 들을 수 있어야 한다. 2인칭은 1인칭이 만들어낸 간절한 대상이다. 1인칭이 2인칭을 부르는 그 순간, '나'는 '너'로 인해 '내'가 된다. 2인칭 당신이 있기 때문에 1인칭은 2인칭을 그리워하거나, 간절히 바라거나, 혹은 원망하거나 증오할 수 있다. 2인칭은 매혹적이고 불길한 호명이다. (p.42)



읽어놓고 웃었다. 어색하고 간지러워서.


한꼭지 더. 

어디가 좋을까 뒤적이다가 찾아낸다.

 

 

그녀를 기다리는 차 안에서 그는 백미러 속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그 기다리믄 모호한 행복과 날것의 불안을 뒤섞었다. 기다리는 순간만큼 순수하게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시간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기다리는 순간은 그 사람에 대해 간절하고 비장해진다. 백미러 속으로 모르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어느 순간 그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 사람은 그의 기다림에 대해 유일하고 절대적인 사람인 것 같다.

 

그러나 기다림은 하나의 착란이다. 기다림의 착란은 그가 기다리는 미래라는 것이 하나의 환상이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환상에 볼모로 잡혀 있는 그의 현재를 말해주었다. 그녀에게 더 이상 기다림의 말을 하지 않게 되고, 그들 사이에 어떤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이제 자신의 기다림의 자세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그는 그녀를 기다리던 장소를 습관처럼 지나다가 백미러를 들여다보았다. 11월의 찬비가 내리는 거리에서, 기다림이란 이미 착란적인 습관이었다. 그녀가 나타날 이유는 없었지만, 어떤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가 기다리는 것이 그녀가 아니어도 좋았다. 어쩌면 그의 욕망은 그녀라는 대상이 아니라 기다림 자체에 머물렀는지도 몰랐다.

 

가장 지독한 기다림은 기다림의 기척을 내지 않는 것.

기다린다는 것을 절대로 알리지 않는 기다림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불가능한 것에 대한 가장 순수한 기다림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다리지 않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p.123-124)

 

 

 

우리는 기다림에 관한 예의, 그 농담을 시작한다. 깔깔대고 웃다가, 다른 꼭지를 더 읽는다.

이 부분을 읽기 전에는 아주 많이 뜸을 들였다. 후- 후- 심호흡을 자꾸 했다. 가장 아름답게 생을 탕진하는 장면이었다, 라는 문장이 눈에 밟혔다. 나는 아름답게 생을 탕진하는 중이로구나, 했다. 어느 부분에서 내가 그토록 떨렸던건지.

 

 

사랑은 무거운 생을 송두리째 들어 올리는 축제의 시간을 만나는 것이다. 상투적이고 지리멸렬한 시간으로부터 전속력으로 도주하는 에너지 같은 것. 세상의 모든 축제는 일시적이고, 얼마간의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축제는 그 안에 방탕과 폭력을 포함하고 있으며, 때로 그것은 죽음과 맞먹는 삶의 폭발적인 낭비를 의미한다.

 

그들에게 구체적인 미래가 보장된 것은 아니었으나, 이국의 땅으로 함께 여행하는 상상은 로맨틱한 것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떠들썩한 축제가 열리는 낯선 땅에서 이방의 리듬에 맞추어 손을 잡고 축제의 행렬을 따라가거나, 그 행렬이 지나는 호텔의 2층 창에서 다른 별의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내려다보고 싶었다. 영원히 취기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술을 마시며 서로의 상기된 눈빛을 어루만지고 싶었다.

 

그 순간, 어떤 미래의 약속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가장 아름답게 생을 탕진하는 장면이었다. (p.107)

 

 


사랑의 미래

저자
이광호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11-10-11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한 편의 시처럼, 소설처럼 다가오는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한 ...
가격비교

 

 

 

의도하지 않았던 그의 말이 가슴에 오래 남는다.

당신을 처음 알게됐던 칠년전에는 우리가 이렇게 서로에게 책을 읽어주게 될 줄은 몰랐는데, 했던 말.

그는 가끔 자신도 모르게 그냥 던지는 말이 내게 아주 오래 남는다는 것을 알까.

오래전 겨울에, 이빨 교정했냐고 물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동동주를 앞에 두고 당신은 술취하면 예뻐지네, 했던 것처럼.

'사랑의 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신의 첫,  (0) 2015.01.14
그는 나를 앞에 두고 옆사람과 너무 화사하다  (3) 2015.01.09
본연의 나  (0) 2014.12.18
오리  (0) 2014.11.27
쉽지 않지.  (0) 2014.11.24
Posted by ssabine
2014. 12. 18. 10:40

"크리스가 보고싶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나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는 걸 보았어요. "그렇다면 내가 그라고 생각해 봐요." 나는 내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몰랐어요.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죠. 갑자기 그것이 가능한 하나의 방법 같았어요. "뭐라고요?" 그녀는 이렇게 말했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어요. 내가 다시 말했어요. "내가 그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천천히, 어둠 속에서 말없이, 우리는 했어요. (p.95)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저자
모신 하미드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2-11-3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사랑에 빠진 파키스탄 청년, 9.11을 목...
가격비교



되고 싶은 나와 본연의 나는 다르다.

나는 다른 나를 연기할 수도 없다. 그렇게 생겨먹은 인간인 것이다.

'사랑의 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는 나를 앞에 두고 옆사람과 너무 화사하다  (3) 2015.01.09
나는 가장 아름답게 생을 탕진하는 중이다.  (8) 2014.12.22
오리  (0) 2014.11.27
쉽지 않지.  (0) 2014.11.24
I Don't Want To Change You  (0) 2014.11.24
Posted by ssabine
2014. 11. 27. 22:11

오리


이윤학




오리가 쑤시고 다니는 호수를 보고 있었지.
오리는 뭉툭한 부리로 호수를 쑤시고 있었지.
호수의 몸속 건더기를 집어삼키고 있었지.
나는 당신 마음을 쑤시고 있었지.
나는 당신 마음 위에 떠 있었지.
꼬리를 흔들며 갈퀴손으로
당신 마음을 긁어내고 있었지.
당신 마음이 너무 깊고 넓게 퍼져
나는 가보지 않은 데 더 많고
내 눈은 어두워 보지 못했지.
나는 마음 밖으로 나와 볼일을 보고
꼬리를 흔들며 뒤뚱거리며
당신 마음 위에 뜨곤 했었지.
나는 당신 마음 위에서 자지 못하고
수많은 갈대 사이에 있었지.
갈대가 흔드는 칼을 보았지.
칼이 꺾이는 걸 보았지.
내 날개는
당신을 떠나는 데만 사용되었지.




내 생의 중력(문학과 지성 시인선 400)

저자
홍정선 (엮음), 강계숙 (엮음)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주) | 2011-10-25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400호 발간을 맞은 첫, 시집 시리즈 33년간 이어온 한국 현...
가격비교



'사랑의 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가장 아름답게 생을 탕진하는 중이다.  (8) 2014.12.22
본연의 나  (0) 2014.12.18
쉽지 않지.  (0) 2014.11.24
I Don't Want To Change You  (0) 2014.11.24
크-  (0) 2014.11.17
Posted by ssabine
2014. 11. 24. 17:16

연애 상담을 청해오는 사람들에게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도무지 상대방이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이다. 그럴 때는 항상 '뜻밖으로'만 도망치는 상대방보다도 '내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옳다고 믿는 자신을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 막상 상대방이 뜻대로만 움직여준다면 사랑은 결코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상대방에게서는 어떤 의외성도 어떤 매력도 느낄 수 없으니. 우리의 듯밖으로만 한사코 도망 치는 존재, 늘 짐작할 수 없는 곳으로 도망침으로써 '나'라는 소우주의 경계를 넓혀주는 타자가 바로 우리의 영혼을 뒤흔드는 존재,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이 끊임없이 나의 영토 바깥으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긴장감은 사랑의 '폐해'라기보다는 사랑의 '필수영양소'다. 붙잡으려 할수록 더 멀어지는 상대방을 향한 안타까움은 사랑을 무럭무럭 자라나게 한다.


누군가를 '붙잡으려 한다'는 행동 자체에는 근원적 폭력성이 잠재한다. 아무리 사랑하는 마음이 커도 그 마음이 내 곁에 그를 잡아두기 위한 것이라면 타자의 타자성은 죽어버린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에게 너무 많은 것을 원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폭력이 될 수 있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어?' 이런 감정이야말로 사랑을 '맞교환'으로 환원해버리는 분노의 본전계산법이다.

애초부터 사랑에는 '본전'이란 없다. 사랑은 매번 우리에게 '무(無)'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것을 요구한다. 매번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고 매번 보석 같은 깨달음을 얻어도, 다음 사랑 앞에서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우리는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상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란다. 사랑이 없을 때 불가능했던 모든 것이 이제는 가능해질 것이라 믿는다. 미국의 심리학자 로버트 존슨(Robert A. Johnson)은 말한다. "사랑은 신의 완전성을 상대방에게 투사하는 폭력이 될 수 있다"고.


로버트 존슨은 서로에게 '완전성'과 '절대성'을 요구하는 로맨틱 러브가 인간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만드는지를 지적한다. 사랑은 잠든 무의식의 저장고를 폭파하는 화약이 될 수 있다. 그 화약은 창조적 무의식을 실현하는 '뮤즈'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삶 자체를 파괴하는 치명적인 독약이 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나의 콤플렉스가 한없이 더 커지는 느낌이 들 때, 사랑은 맹독이 될 수 있다. 단지 사랑한다는 이유로 과거의 모든 것을 다 알아내려 혈안이 되어 있는 연인 앞에서, 사랑은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도 있다. 더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더더욱 서로를 상처 입히는 것, 그 끝나지 않는 상처교환의 악순환만이 지독한 사랑의 추억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타자의 타자성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타자를 타자인채로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정답은 없겠지만, 우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를 철회하는 것이다. '사랑의 완전성'과 '상대방의 완전성'에 대한 기대를 철회하는 것. 그리고 '나의 사랑'과 '너의 사랑'을 비교하는 작업을 끝장내는 것이다. 내 사랑에 비해 네 사랑이 얼마나 작은가를 매번 측정하는 일은 사랑 자체를 끝없는 서바이벌 게임으로 만들어버린다. 사랑에 푹 빠져 있으면서도 사랑으로부터 유체이탈할 수 있는 용기, 더없이 사랑하지만 사랑으로부터 담담히 거리를 둘 수 있는 여유야말로 '사랑에 빠진 당신'에게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렇다고 맹목적 사랑에 빠지지 않기 위해 너무 조심할 필요는 없다. 조심하고, 통제하고, 경계하는 것은 사랑과는 어울리지 않는 반낭만적 행태다. 아무리 실패한 사랑이라도 사랑은 자아에 매몰된 협소한 삶을 세상 바깥으로 끌어내어 우리 정신의 터전을 확장시킨다. 그런 열정과 그런 숭고함은 사랑 아닌 것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다. 그러니 두려움 없이 마음껏 사랑에 빠지자. 사랑에서 무언가 가시적인 성과를 얻으려 전전긍긍하지만 않는다면, 사랑은 자아를 확장하는 최고의 연금술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랑에 빠진 채 감정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것이 누구도 사랑하지 않은 채 꼿꼿한 자아를 고수하는 것보다는 백만 배쯤 낫다. 어떻게 평생 '나'와 더불어 오직 '나'로만 살 수 있겠는가. 사랑은 타자를 자아로 변신시키는 기술이 아니라, 나조차도 낯선 타자로 만드는 영혼의 마술이다. (p.49-52)





마음의 서재

저자
정여울 지음
출판사
천년의상상 | 2013-02-18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내가 사랑하는 책,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책 나만의 서재에서 인...
가격비교


'사랑의 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본연의 나  (0) 2014.12.18
오리  (0) 2014.11.27
I Don't Want To Change You  (0) 2014.11.24
크-  (0) 2014.11.17
에라이, 나도 모르겠다.  (9) 2014.11.16
Posted by ssab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