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1. 13. 09:36

어제 트위터를 통해 한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다. 내 글을 봤다며 아버지를 인터뷰 하고 싶다는 거였다. 원한다면 모자이크 처리나 음성변조를 할 거라며, 감정 노동에 대한 인터뷰를 해줄 수 있겠느냐 묻더라. 나는 당연히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그래도 혹시 몰라 아버지께 여쭤보고 알려드리겠다 했다. 내가 그동안 봐 온 아버지는 그런 걸 할 리 없는 분이니까. 그 방송은 아마도 고발 방송 쯤이 될텐데, 거기에 나서서 인터뷰를 할 분이 아니시다. 그래서 어제 집에 돌아가 여쭤보았더니, 당연하게도 '아니'라고 대답하셨다. 아빠는, 조만간 다시 경비 일을 시작하실 건데, 아무리 모자이크 처리한다고 해도 그것이 앞으로의 구직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하셨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렇다. 그리고 그걸 떠나서도, 아빠는, 앞에 나서는 걸 무엇보다 꺼려하는 분이시다. 그래서 나는 오늘 그 방송국에 연락을 했다. 유감스럽게도 아버지는 하지않겠다 하셨다, 고.



씁쓸했다. 나와 내 아버지의 자리는 여기구나, 하는 생각 때문에. 

인터뷰 요청이라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자랑스러움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할텐데, 나에게 혹은 나의 아버지에게는 사회의 부당함, 약자의 입장을 대변하라고 하다니. 그것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이미 알고 있던 내가 자리한 위치가 와닿았다고 해야할까. 물론 나는 오피니언 리더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연예인이 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유명해지고 싶다거나 이름을 떨치고 싶다거나 한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약자이고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는 쪽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이 씁쓸했다. 어차피 이 사회에서 내 자리는 여기구나, 하는. 나는 감정 노동이 힘들고 부당하며 부조리하다, 고 대변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인, 그런 사람의 딸이구나. 


아, 뭐 그렇다고 우울하다거나 한 건 아니고, 그저 순간 그런 기분이 들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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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
2014. 11. 11. 10:41

티타늄



펠리체 판티노에게




부엌에는 마리아가 생전 처음 보는 옷차림을 한, 키가 매우 큰 남자가 있었다. 그는 신문지로 만든 종이배를 머리에 쓰고,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하얀 장롱에 칠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얀 페인트가 어떻게 그리 작은 통 속에 담겨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리아는 그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 죽을 것만 같았다. 남자는 가끔 파이프를 장롱 위에 올려놓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다가 휘파람을 멈추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끔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따금 쓰레기통 쪽으로 가서 침을 뱉은 뒤 손등으로 입을 닦았다. 쉽게 말해 그는 너무나 이상하고 낯선 행동들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를 지켜보는 일은 정말 흥미로웠다. 장롱이 하얗게 칠해지자 그는 페인트 통과 바닥에 널려 있던 신문지들을 주워 모두 찬장 옆으로 가져갔다. 그러더니 찬장도 하얗게 칠하기 시작했다.

장롱이 너무나 윤이 나고 깨끗하고 하얘서 그걸 꼭 만져봐야 할 것 같았다. 마리아가 장롱에 다가가자 남자가 알아차리고 말했다. "만지지 마라, 만지면 안 된다." 마리아는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왜요?" 그 질문에 남자가 대답했다. "만질 필요가 없으니까." 마리아는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물었다. "왜 이렇게 하얀 거에요?" 무척 어려운 질문이라는 듯 남자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티타늄이니까."

마리아는 괴물이 등장하는 동화책을 읽을 때처럼 두려움으로 인한 전율이 기분 좋게 온몸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마리아는 주의 깊게 남자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남자의 손에 칼이 들려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변 어디에도 칼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어딘가에 숨기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 "제 뭘 자른다는 거예요?" (마리아는 티타늄의 이탈리아어 발음 '티나니오'를 '티 탈리오'(너를 잘라버리겠다)로 잘못 알아들었다.) 이 질문에 남자가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거였다. "네 혀를 잘라버리겠다."하지만 그저 이렇게만 말했다. "널 자른다는 게 아냐. 티타늄이라고."

결론적으로 그는 매우 힘이 센 남자가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인자하고 친절해 보였다. 마리아가 물었다. "아저씨 이름이 뭐예요?" 남자가 대답했다. "펠리체." 그는 입에서 파이프를 빼지 않았다. 그래서 말을 할 때면 파이프가 위 아래로 춤을 췄지만 떨어지지는 않았다. 마리아는 남자와 장롱을 번갈아 쳐다보며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의 대답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왜 이름이 펠리체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감히 그렇게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이들은 절대 이유를 물어봐서는 안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친구 알리체는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이름이 알리체(알리체는 여자 이름이지만, 작은 멸치인 '앤초비'라는 뜻도 있다. 알리체와 펠리체의 발음이 비슷해서 이렇게 생각한 것.) 였다. 이 남자 같은 어른의 이름이 펠리체라는 게 정말 이상했다. 하지만 차츰차츰 이 남자를 펠리체라고 부르는 게 자연스러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펠리체가 아닌 다른 그 어떤 이름으로도 부를 수 없을 것 같기도 했다.

칠을 한 장롱이 너무 하얘서 부엌에 있는 다른 물건들이 누렇고 더럽게 보일 정도였다. 마리아는 장롱 옆에 가까이 가봐서 안 될 것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만지지 않고 그저 보기만 할 것이다. 하지만 마리아가 발끝으로 살금살금 장롱으로 다가가고 있을 때, 예기치 못한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졌다. 남자가 갑자기 돌아보더니, 마리아와 두어 발자국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다가왔다. 주머니에서 하얀 백묵을 꺼내더니 마리아가 서 있는 바닥에 둥근 원을 그렸다. 그리고 말했다.

"이 원 밖으로 나오면 안 된다." 그러더니 성냥을 켜서 입술을 이상하게 비틀며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다시 찬장을 칠하기 시작했다.

마리아는 쪼그리고 앉아서 오랫동안 둥근 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원에 출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한 지점을 문질러 보았다. 그리고 실제로 백묵 자국이 지워지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남자가 이 방법이 유효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원은 분명 마법의 힘이 있었다. 마리아는 가만히 아무 말 없이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가끔씩 발을 뻗어 발끝으로 원을 건드려 보았고 거의 균형을 잃을 정도로 몸을 앞으로 내밀어 보았다. 하지만 손가락이 장롱이나 벽에 닿으려면 아직도 한 뼘 이상이 부족하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찬장이, 의자들과 식탁이 점점 더 아름다워지고 하얘지는 모습을, 가만히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참 뒤에야 남자는 붓과 작은 통을 내려놓고 머리에서 신문지 종이배를 벗었다. 모자를 벗자 다른 남자들과 똑같은 머리가 드러났다. 잠시 후 남자는 발코니로 나갔다. 마리아는 그가 뭔가를 뒤적이는 소리를 들었고 옆방에서 왔다 갔다 하는 소리를 들었다. 마리아가 그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저씨!" 처음에는 조그맣게 그러다가 점점  크게 하지만 지나치게 크게 부르지는 않았다. 사실은 혹시 남자가 그 소리를 들을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가 부엌으로 돌아왔다. 마리아가 물었다. "아저씨 이제 나가도 돼요?" 남자는 마리아와 둥근 원을 내려다보더니 큰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여러 가지 말들을 했다. 하지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 물론이지. 이제 나와도 돼." 마리아는 당황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하지만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러자 남자가 걸레를 집어 마법을 풀기 위해 원을 깨끗이 지워주었다. 원이 사라지자 마리아는 일어서서 깡총깡총 뛰어 밖으로 나갔다. 마리아는 아주 행복했고 기분이 좋았다. (pp.240-244)






주기율표

저자
프리모 레비 지음
출판사
돌베개 | 2007-01-12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아우슈비츠를 통해 인간성의 한계를 성찰한 현대문학의 고전, 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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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sabine
2014. 11. 10. 16:30

바닥

 

괜찮아, 바닥을 보여줘도 괜찮아

나도 그대에게 바닥을 보여줄게, 악수

우린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위로하고 위로받았던가

그대의 바닥과 나의 바닥, 손바닥

 

괜찮아, 처음엔 서툴고 떨려

처음이 아니어서 능숙해도 괜찮아

그대와 나는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핥았던가

아, 달콤한 바닥이여, 혓바닥

 

괜찮아, 냄새가 나면 좀 어때

그대 바닥을 내밀어봐,

냄새나는 바닥을 내가 닦아줄게

그대와 내가 마주앉아 씻어주던 바닥, 발바닥

 

그래, 우리 몸엔 세 개의 바닥이 있지

손바닥과 혓바닥과 발바닥,

이 세 바닥을 죄 보여주고 감쌀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겠지,

언젠가 바닥을 쳐도 좋을 사랑이겠지





자두나무 정류장

저자
박성우 지음
출판사
창비 | 2011-11-25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한국 서정시의 맥을 잇는 시인으로서 시단의 큰 기대와 주목을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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