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상담을 청해오는 사람들에게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도무지 상대방이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이다. 그럴 때는 항상 '뜻밖으로'만 도망치는 상대방보다도 '내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옳다고 믿는 자신을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 막상 상대방이 뜻대로만 움직여준다면 사랑은 결코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상대방에게서는 어떤 의외성도 어떤 매력도 느낄 수 없으니. 우리의 듯밖으로만 한사코 도망 치는 존재, 늘 짐작할 수 없는 곳으로 도망침으로써 '나'라는 소우주의 경계를 넓혀주는 타자가 바로 우리의 영혼을 뒤흔드는 존재,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이 끊임없이 나의 영토 바깥으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긴장감은 사랑의 '폐해'라기보다는 사랑의 '필수영양소'다. 붙잡으려 할수록 더 멀어지는 상대방을 향한 안타까움은 사랑을 무럭무럭 자라나게 한다.
누군가를 '붙잡으려 한다'는 행동 자체에는 근원적 폭력성이 잠재한다. 아무리 사랑하는 마음이 커도 그 마음이 내 곁에 그를 잡아두기 위한 것이라면 타자의 타자성은 죽어버린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에게 너무 많은 것을 원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폭력이 될 수 있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어?' 이런 감정이야말로 사랑을 '맞교환'으로 환원해버리는 분노의 본전계산법이다.
애초부터 사랑에는 '본전'이란 없다. 사랑은 매번 우리에게 '무(無)'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것을 요구한다. 매번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고 매번 보석 같은 깨달음을 얻어도, 다음 사랑 앞에서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우리는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상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란다. 사랑이 없을 때 불가능했던 모든 것이 이제는 가능해질 것이라 믿는다. 미국의 심리학자 로버트 존슨(Robert A. Johnson)은 말한다. "사랑은 신의 완전성을 상대방에게 투사하는 폭력이 될 수 있다"고.
로버트 존슨은 서로에게 '완전성'과 '절대성'을 요구하는 로맨틱 러브가 인간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만드는지를 지적한다. 사랑은 잠든 무의식의 저장고를 폭파하는 화약이 될 수 있다. 그 화약은 창조적 무의식을 실현하는 '뮤즈'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삶 자체를 파괴하는 치명적인 독약이 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나의 콤플렉스가 한없이 더 커지는 느낌이 들 때, 사랑은 맹독이 될 수 있다. 단지 사랑한다는 이유로 과거의 모든 것을 다 알아내려 혈안이 되어 있는 연인 앞에서, 사랑은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도 있다. 더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더더욱 서로를 상처 입히는 것, 그 끝나지 않는 상처교환의 악순환만이 지독한 사랑의 추억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타자의 타자성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타자를 타자인채로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정답은 없겠지만, 우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를 철회하는 것이다. '사랑의 완전성'과 '상대방의 완전성'에 대한 기대를 철회하는 것. 그리고 '나의 사랑'과 '너의 사랑'을 비교하는 작업을 끝장내는 것이다. 내 사랑에 비해 네 사랑이 얼마나 작은가를 매번 측정하는 일은 사랑 자체를 끝없는 서바이벌 게임으로 만들어버린다. 사랑에 푹 빠져 있으면서도 사랑으로부터 유체이탈할 수 있는 용기, 더없이 사랑하지만 사랑으로부터 담담히 거리를 둘 수 있는 여유야말로 '사랑에 빠진 당신'에게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렇다고 맹목적 사랑에 빠지지 않기 위해 너무 조심할 필요는 없다. 조심하고, 통제하고, 경계하는 것은 사랑과는 어울리지 않는 반낭만적 행태다. 아무리 실패한 사랑이라도 사랑은 자아에 매몰된 협소한 삶을 세상 바깥으로 끌어내어 우리 정신의 터전을 확장시킨다. 그런 열정과 그런 숭고함은 사랑 아닌 것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다. 그러니 두려움 없이 마음껏 사랑에 빠지자. 사랑에서 무언가 가시적인 성과를 얻으려 전전긍긍하지만 않는다면, 사랑은 자아를 확장하는 최고의 연금술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랑에 빠진 채 감정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것이 누구도 사랑하지 않은 채 꼿꼿한 자아를 고수하는 것보다는 백만 배쯤 낫다. 어떻게 평생 '나'와 더불어 오직 '나'로만 살 수 있겠는가. 사랑은 타자를 자아로 변신시키는 기술이 아니라, 나조차도 낯선 타자로 만드는 영혼의 마술이다. (p.49-52)
- 저자
- 정여울 지음
- 출판사
- 천년의상상 | 2013-02-18 출간
- 카테고리
- 인문
- 책소개
- 내가 사랑하는 책,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책 나만의 서재에서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