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이 죽었다는 소식을 길동역에 내려 집에 걸어가는 길에 알게됐다. e 양이 왓츠앱으로 말해준 것. 아니야 그럴리없어, 하는 마음으로 포털을 봤다가 그가 정말로 사망했다는 것을 알게됐다. 그를 들어낸다면 내 어린 혹은 젊은 시절이 많이 어두워질 정도로 나에겐 아주 많은 음악으로 영향을 준 사람인데, 나는 이 충격과 슬픔을 혼자만 알고 있기가 벅찼다. 물론 아주 빠른 시간내에 모두가 알게 될테지만, 남동생에게 전화해서 알렸고 여동생에게도 전화해서 알렸다. 우리 모두가 좋아한 가수였고 그는 우리 모두에게 정말 특별했으므로.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B 에게 문자로 알렸고, 그간 연락하며 지내지 않았던 Y 에게도 뜬금없이 문자를 보내 신해철의 사망을 얘기했다. 그간 통화라는 걸 해본적 없던 A 에게도 알렸고, 정식이에게도 알렸다. 왓츠앱의 친구들에게도 알렸고 트윗에도 올렸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 했는데, 반이 되지 않았다. 다만, 모두가 그를 추모한다는 데서 위로를 받았다. Y 는 소주를 한 잔 빨거라고 했다, 형의 노래를 들으면서. 문자 대화가 조금 오고가고 멈춘 뒤 그는 툭,
Hero 라는 노래 제일 좋아해요
라고 보내왔고, 나는 이 문자가 그렇게나 좋았더랬다. 그래서 다다다닥, 따발총같은 문자를 퍼부었다.
인형의 기사 좋아해요
백수가도
최근앨범도 다 좋던데
무한궤도의 여름이야기도 보석 같은 곡이에요
우리앞에 생이 끝나갈 때도
그리고나서 전(前)남친으로부터 메세지가 왔다. 신해철의 사망 소식을 내게 전했다. 사실 나도 그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부러 연락하지 않았다. 우리는 사귀는 초반에 신해철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다. 그와 통화를 처음 했던 때, 내가 그에게 목소리가 신해철 닮았다고 얘길했었고, 그러자 그는 더 신해철 목소리를 흉내내며 이야기를 했던 것. 그러니 내게 연락을 한 그의 마음은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신해철의 장례식에 갈거라고. 나는 조금 생각한 뒤에 그래, 라고 답을 했지만, 그때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그의 이런점들이 좋았던 것 같다, 고.
나는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는 한번도 그를 좋아한 적이 없는것 같지만, 내 나름대로는 그의 장점들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은, 나는 그의 장점들을 좋아했던거지 그의 단점까지 커버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단점들이 싫었고, 이것을 '그럼에도불구하고'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그의 단점들을 볼때마다 어김없이 싫다고 했던것 같다. 답답해했덨것 같다. 그러면서 그와 연인관계이기 때문에 장점을 더 부각시키려고 했던 것도 같다.
생각해보면 내가 '사랑하지 않은채'로 했던 연애들에 있어서도 분명 상대들의 어떤 점들은 좋았던 것 같다. 가장 마음이 아픈 연애는 K 와 한 것이었는데, 당시 나는 J 로부터 차이고 엄청 멘탈에 충격을 받고 가슴에 스크래치를 받아서 진짜 매일 지옥을 걷고 있었다. 그때 K 가 나타나 달콤한 말들을 속삭이며 우리는 운명적인 사이라고 말했고, 나는 운명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없이 그의 말들을 덥썩 받아들며 그와 연인이 되었다. 거기에는 K 를 향한 사랑은 눈꼽만큼도 없었고 다만, J 에게 보이고 싶은 열망만이 있었다. 이거봐라, 나 너한테 차여도 나 좋다는 남자 만날 수 있다, 하는. 나는 K 를 사랑하지도 않았지만 만났고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쓸모없는 시간은 아니었다. 나는 안정됐고 좀 편안해졌다. 사실 주말마다 그에게 시간을 '내어준다는' 생각이 드는게 몹시 거슬렸지만, 어떤것들을 포기해야만 또다른 어떤것들이 얻어진다고 생각하면 기꺼이 내가 감당할 몫이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연애는 강하지 못하고, 여차저차 나는 그와 헤어졌다. 그와 헤어지고나서는 그와 친구처럼 지내길 원했지만 그가 내게 여전히 다른 것들을 바라는 데에야 계속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를 차단했다. 나를 여전히 애틋한 시선으로 보는 그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를 볼 때마다 내 선택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참을수가 없었다. 그가 잘못한 게 아니라 그는, 내 잘못의 상징이었다. 그에게 미안했고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를 꼴도보기가 싫었다. 못난 나를 마주하는 것 같은 그 마음이 들게 하는 게 싫었다. 그를 향한 죄책감과 나를 향한 수치심.
S는 오히려 한결 편했다. 그는 그저 내가 선택한 연애의 상대였다. K 처럼 죄책감이 들 필요도 없었고 어떤것으로부터 굳이 도망치기 위해 선택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연애를 위한 연애였다는 생각은 든다. 그를 친구로 만났으면 훨씬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두고두고 한다. 그에게는 장점이 있고, 그 장점은 분명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썩 좋지 않은 연애였다고 생각하지만, 또한 사랑했다고 생각되어지는 상대들도 아니었지만, 그당시엔 그 당시대로 내가 그들을 '좋아했던' 이유가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데도 그냥 만나진 않았다. 그러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앞으로는 이러지말자, 하는 결심을 하는 계기도 되었다. 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거기에서 무언가를 배워가기를 바랄뿐이다.
샤워를 하면서 장례식장에 같이 가자고 할까, 하고 잠깐 생각하다가 이내 그러지 말자, 라고 생각했다.
나는 분명 연애가 일상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연애를 하고 산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 될 수 있을거라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상대와 연애를 위한 연애를 하는 것은 쌍방에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내가 왜 이걸 알기까지 저런 경험을 했어야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경험하지 않는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깨우치지 못하는 사람인 것 같다.
영화 《내가 너를 사랑할수 없는 10가지 이유》를 보면 언니가 여동생에게 '저남자를 조심하라, 저 남자와 연애하지 말라'고 조언을 한다. 여동생은 언니가 왜 내 연애에 참견하냐고 맞서고 언니는 '내가 저놈을 만나봤는데 개놈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자 동생이 대꾸한다. '언니도 해보고 알았잖아, 나도 내가 해보고 깨닫겠다고!'
그전까지 나는 '내가 해봤는데 저놈이 개놈이다' 라고 말하는 부류의 인간이었으나, 저 영화를 보고 내가 잘못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특히나 연애에 대해서라면, 그놈이 개놈이다라고 내가 단정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열명의 남자와 열명의 여자가 서로 연애를 하면 열개의 스토리가 탄생하고, 그들끼리 멤버를 바꾸면 또다른 열개의 이야기가 탄생한다. 나에게 개놈이 다른 사람에게는 안개놈이 될 수도 있고, 나에게 천사가 누군가에게는 미친놈이 될 수도 있다. 사실 어떤 굵직한 부분들은 변함없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을테지만, 워렌 비티도 아네트 베닝을 만나 개과천선한것처럼, 나는 나의 경험에 비추어 '내가 이랬으니 그건 안돼' 라고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이 이제는 옳지 못하다는 것도 안다. 사람은 모두 다르고 또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다른 포지션을 부여받는다. 나는 어떤 남자들에게는 도도한 여자였을 수 있고 어떤 남자들에게는 모자란 여자였을 수도 있다. 어떤 남자들에게는 도무지 마음을 잡을 수 없었던 여자일 수도 있고 어떤 남자에게는 강아지처럼 쫓아다니는 여자일 수도 있다.
오늘은 정식이와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식이에게 말했다. '내가 그렇게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그렇게 못하겠지만, 당신에게는 말하고 싶네요. 끝까지 가보고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는것도 방법이라고요.' 라고. 똥이 더럽다고 대문 밖으로도 나가지 않는건 아니지 않냐고, 똥이 더러워서 대문 밖으로 안나가는 내가 말했다.
모든 연애는 아직 해보기 전이라면,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나은것 같다. 그리고나서야 어떤 연애를 피할건지에 대한 혜안이 생기는거라면, 기꺼이 개똥같아 보이는 연애에도 뛰어드는 게 방법일 수 있을 것 같다. 안하고 후회하느냐 하고나서 영혼에 스크래치 생기느냐는 뭐, 자기 선택에 따른 것이지만, 무릇, 한번도 사랑해본적 없는 것보다 사랑의 고통을 아는 게 더 낫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