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늦은 밤에 잠이 오질 않아 텔레비젼을 켰는데, 그러다가 영화 [사랑과 영혼]을 중간부터 다시 보게 됐다. 벌써 한 세번째 보는 것 같다. 샘(패트릭 스웨이지)이 데이트 도중 길에서 살해 당하는데, 그게 알고보니 직장동료이자 절친인 '칼'이 시킨 거였고, 이걸 알게 된 영혼'샘'은 칼에게 복수하며 위험에 빠진 자신의 애인 '몰리'(데미 무어)를 구하려고 한다. 억울해서 아직 천국에 올라갈 수 없었던 것. 이 과정에서 영매인 오다메(우피 골드버그)를 만나게 되는데, 오다메는 영혼인 샘과 현실세계를 이어주는 매개이다.
중간에 그런 장면이 나온다. 샘이 칼의 돈(물론 본래는 칼의 돈이 아니다) $4,000,000.00 을 오다메를 통해 인출하는 것. 당연히 이 돈을 잃은 칼은 눈이 뒤집히게 되는데, 오다메는 그 돈을 가지고 뭘 해야하나, 여동생 먼저 단식원에 보낼까, 같은 행복한 고민을 한다. 이 큰 돈이 내 손에 들어왔어! 하고, 너무나 큰 액수에 믿지 못해하며 여러갈래의 꿈을 꾸는 것. 이에 샘은 말한다. 그 돈은 네 돈이 아니다, 그 돈을 가지면 네가 큰 위험에 처한다, 그 돈을 놓아야 니가 살 수 있다, 고. 그러면서 길에서 모금하고 있는 수녀에게 그 돈을 줄 것을 요구한다.
오다메는 당연히 싫어한다. 이렇게 큰 돈인데, 자기가 평생 살면서 만져본 적이 없는 큰 액수인데, 뭐라고? 이걸 전부 다 기부하라고? 말이돼? 미쳤어? 그러나 그 돈을 가지고 있으면 곧 샘을 죽였던 자들이 자신을 죽일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기부하기로 결심한다. 결심하고, 수표에 이서를 하고, 그렇게 수녀에게 내미는데, 수녀가 감사하다며 그걸 받아들려 하지만, 오다메는 그 손을 쉽게 놓지 못하는 거다. 아, 4백만불이 내 손에서 빠져나간다, 놓아야 한다, 그런데 놓기 싫다..... 하는 내적갈등이 오다메의 얼굴 표정과 손짓을 통해 그대로 드러난다.
나는 b 와의 관계에서 4백만불을 손에 쥔 오다메 같은 입장이었다. 어제 그 장면을 보면서, '어, 나네' 했던 거다. 놓아야 하는 걸 알지만 놓고 싶지 않은.
b를 10년간 한결같이 사랑하면서 이번만큼 화나는 적이 없었다. 나도 내 화가 감당이 안될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그의 잘못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다만, 내가 이 포지션의 나를 견딜 수 없었던 것 같다. 만약 내가 이 포지션에 있으면서 상대가 다른 남자였다면, 나는 진작에 이 관계를 끝냈을 거다.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나랑 사귈 수는 없다고 말하는 남자를 사랑하면서 사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내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도 알고 있고, 그러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우리 둘이 맺어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와 내가 바라보는 방향도 같지 않았고. 애초에 다시 연락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그러므로 친구가 되기로 했었다. 서로 너무 좋아하고 또 대화도 잘 통화니까 이렇게 친구로 오래 가기로. 나는 그동안 사귄 남자와 친구로 만나는 일은 잘 못해왔는데, 상대가 희망과 절망을 왔다갔다 하는 게 보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반대의 입장이 되었다. 내 사랑을 알고 있으며, 그것이 얼마나 큰지도 잘 알고 있었고, 또 자신의 사랑을 속삭이는 남자였고, 그렇게 인생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면서, 그러나 우리가 사귀면 끝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남자는, 그러므로 번번이 나를 아프게 했다. 나는 이 포지션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나랑 연락하는 동안 다른 연애를 한 것도 아니었고, 또 내가 호주에 가기까지 다른 연애를 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언제나 연애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걸 견디는 게 몹시 힘들었다. 그가 모임에 나가고, 여자사람 친구가 생기고 하는 것들이 매순간 내게 '내일은 이 관계가 끝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심어줬고, 이런 일이 계속될텐데, 내가 이걸 견딜 수 있을까, 를 생각하면 답은 '아니'였던 거다.
사실 헤어짐은 몇 개월 전부터 생각하고 잇었다. 충분히 사랑했으니, 이제 그만두자, 라고 생각했던 거다. 그래서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면서도, 이제 헤어질 수 있을 것 같고 그래야 할 것 같아, 라는 얘기를 여러번 했다. 5월 초에는 '아, 이런 포지션에 나를 두지 말자, 이런 포지션에 있는 거 내가 스스로 진짜 못할 짓이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밤새 깊은 고민을 하고 결론을 내렷는데, 다음날 아침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아, 조금만 더하자..' 했던 거다. 이 사람을 어떻게 놓고 사나, 그게 더 힘들지 않을까 했던 것. 그러니까 나는 그의 옆에 있으면서 힘든 것과, 그가 내 삶에서 빠져나간 후에 힘든 것 중에서 뭐가 더 힘들까를 고민했고, 항상 후자가 더 힘들다고 나왔으므로 '그만두자'는 말을 꺼내지 못했던 거다.
이번에는 그의 말대로 '터질 게 터진'거였다. 지난 10년간 그가 나를 서운하게 한 적도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화나게 한 적은 없었고, 화가 난 건 나로서도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는데, 내가 더 힘든건, 내가 화를 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는 거였다. 만약 똑같은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 있었다면, 전혀 화낼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해나 프라이'가 그랬듯이, 사랑에는 공식을 넣고 답이 딱딱 나오는 게 불가능하지 않은가. 엄연히 내 포지션이란 게 있고 감정이란 게 있으니, 머리로 '화낼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해도 이미 가슴 속에는 화가 너무 나는 거다. 어떻게, 내가 사랑한다는 걸 알고 또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나를 이렇게 괴롭게 해? 했던 것.
그에게 시간을 갖자고 말하고 그 시간동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면서, 나는 내 화가 풀리길 바랐다. 그러나 풀리지 않았다. 여전히 그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내 감정이 받아들이지 못해서였고, 내 감정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나의 이 어정쩡한 포지션 때문이었다. 일전에 여자1이 나에게 '너는 왜 꼭 관계를 규정지어야만 한다고 생각해?'라고 물었던 적이 있는데, 나는, 그런 사람인 거다. 어쩔 수 없다. 그의 '연인'이라는 포지션에서는 한없이 안정적이었는데, 이런 어정쩡한 포지션에서의 나는 질투와 시기가 생겼고, 질투와 시기는 나를 힘들게 했다. 내가 갖고 싶지 않은 감정인데 생겨나는 게 내 스스로도 몹시 못마땅했다. 무엇보다 내가 나를 이런 위치에 놓아두는 거, 그게 나에게 못할 짓이란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결론은 '이 관계는 그만두자'는 거였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화가 많이 나있는 상태였고, 그렇게 화난 상태로 그만두자는 말을 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이 관계는 결국엔 끝날 것이고, 그렇게 될 때는 웃으면서 안녕하고 싶다, 는 것이 나의 바람이었다. 그러나 어제, 그가 먼저 내게 이 관계를 그만두자고 말했다. 번번이 내가 결심하고 말하지 못했던 것을 그가 대신 했다. 이유는 내가 생각한 것과 같았다.
나는 어떻게든 내 화를 죽이려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생각해보았고, 내 스스로 나를 위로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그만두는 게 맞다는 것을 몇 개월전부터 알고 잇었으면서도, 이 사람의 손을 놓으면 앞으로 평생을 후회할까봐 차마 입밖으로 내지 못했다. 손을 놓는 것 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그런데 번번이 힘들고, 화나고, 왜 내가 이 포지션에 있어야 하는지 또 원망스럽고..... 그래서 막상 그가 그만두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다고 말을 했을 때, 내가 내린 결론도 역시 그거였으면서, 쉽게 '그러자'고 말을 못했다. 앞으로 내가 후회할 게 뻔히 보여서. 이랬어도 저랬어도 후회는 됐겠지만, 아, 이 손을 놓으면 또 나는 얼마나 힘들까, 그렇지만 이 손을 잡고 있으면 나는 또 얼마나 힘들까, 나는 이런 포지션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왜 내가 좋다면서 인생의 중심으로 끌어당길 노력을 하지 않지?, 물론 우리에겐 아주 큰 차이와 방해물들이 있지만, 그건 서로 조율해갈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만큼 나를 좋아하진 않는건가, 그런데 내가 너무 좋네, 역시 이런 포지션에 있을 수 없어, 그건 내가 나를 너무 고문하는 거야, 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차마 놓지 못했던 건 그를 잃기 싫은 마음이 있었던 거고, 매일매일 그와의 대화가 내겐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의 질투와 시기 때문에 본인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일에 자꾸 미안해져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게 싫다고 했다. 나 역시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만, 자기가 나한테 한 게 있는데, '미안할 일 아니다' 라는 건, 스스로가 나쁘지 않다는 걸 드러내기 위한 합리화에 가깝다고 보인다. 할 거 다하면서, 그렇지만 우리 관계는 애초부터 그런 게 아니었잖아, 내가 미안하지 않아도 될 일이야, 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자기도 그것이 합리화라는 거 알지 않나. 미안해할 일이 아니다 라는 건 자기 스스로가 자기에게 하는 말이고, 그러나 미안한 감정이 든다는 것이, 이 관계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어쨌든 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씨발 느꼈는데 티를 안내는 거 진짜 못하겠고, 애시당초 이런 포지션이 아니었다면 내가 느끼지 않았어도 될 감정이었단 말이다. 어쨌든간 우리는 여기서 그만두는 게 답인데, 아아, 친구로 지내고 싶었지만 친구로 지낸다는 거, 사랑하면서는 너무 힘이 드는구나. 그는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는 내게 다이어트도 열심히하고 더 예뻐지고 잘생긴 남자 만나서 자기한테 연락해 보란듯이 자기를 뻥차라고 얘기했는데, 아아, 그를 십년간 사랑하면서, 그리고 그렇게나 내가 페미니즘 페미니즘 주입시켜놨는데, 그를 알아온 시간 전부를 다 합쳐서도 정말 가장 빻은 발언이었다. 저게 말이야 방구야... 내가 무슨 실연당한 못생긴 여자냐..... 뭘 다이어트도 하고 뭘 더 예뻐져서 보란 듯이 차란 거야, 왜 그렇게 하고 뻥 차, 차기는.... 왜 이 문제를 그렇게 농담해. 아, 너무 빻았어. 남자가 페미니스트 되는 거 너무 어려운건가... 내가 지금 못나서 너랑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또 내가 더 잘나지기 위해서 예뻐지고 날씬해져야 되는 게아니야, 내가 선택한 '더 나은', '더 잘난' 나는, 더 날씬해진 나가 아니야, 더 날씬해야 더 잘났다고 생각하는 건 빻은 한남 생각이고요.. 지금보다 더 성숙하고 더 똑똑해지는 내가 멋있지. 저게 무슨 고딩 첫연애실패 후의 결심같은 거냐.... 아아, 어째서 그런 발언을 해? 아 또 한남의 빻음 같은 거 생각되어서 갑자기 분노가... 나랑 그동안 그렇게나 얘기를 많이 하고서 어째서 그래.......아, 나의 의식의 흐름이여...
어쨌든 나는 그간 사백만불을 손에 쥔 오다메가 되어서, 수녀 앞에 서 그것을 줘야된다고 생각하면서 주지 못하고 있었더랬다. 내적갈등과 자아분열의 꼭대기까지 올라간거다. 그리고 연애에서 자꾸 자아분열과 내적갈등에 놓이는 일이 건강한 일은 아니다. 나는 나를 위해서 이 관계를 정리하는 게 맞았다. 그렇지만 붙잡고 싶어서, 이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나 고민했고, 결국 사랑을 공부하는 건 어떨까 에까지 이르렀던 거다. 사랑이라는 거, 공부하면, 그러면 내가 좀 덜 힘들어하면서 이 관계를 끌고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것. 그렇게 나는 머릿속에서 이 관계를 정리해야 하는 거라고 몇 개월전부터 결심해놓고, 어떻게든 유지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었던 거다. 그렇지만 그가 선택한 건, 정리였다. 그의 결심은 명쾌했지만, 인간적으로 내가 좀 더 멋지고 성숙했던 것 같다. 처음 그를 알던 시절에는 내가 그에게 한없이 부족하게 느껴졌었고, 그래서 이런 내가 이 사람과 감히 사귈 수도 없겠지, 생각햇었는데, 시간이 흐르고 여기까지 오니, 그 사이에 내가 폭풍성장해서, 정신적으로도 인격적으로도 그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어 잇었던 것 같다. 진심이다 ㅋㅋㅋㅋ 내가 그랑 함께하면서 성장한 것도 있지만, 그 역시 나랑 함께 하면서 성장했다. 내 눈에는 그가 성장하는 게 보였고, 그게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바람직했으며, 연애한다고 모두가 다 되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서로를 성장시키는 데 맞춤한 사람이었다. 앞으로 그는 예쁘고 날씬한 여자를 만날 수는 있겠지만, 나처럼 자신을 성장시키는 사람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것이다. 그리고 그건, 그의 선택이었다.
이 포지션이 아니었으면 내가 이런 감정들을 갖지 않았을테고, 그랬다면 우리는 서로를 더 성장시키면서 계속 함께 했을 수도 있다. 나는 그 느낌, 성장하는 그 느낌을 몹시 좋아했던 것 같다. 하나를 또 배우고, 하나가 더 보이고 하는 것들. 그걸 스스로 깨달을 때마다 어찌나 짜릿했던지. 나는 앞으로도 그 느낌을 포기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므로 나는 계속 성장하겠다. 더 예뻐지고 더 날씬해지는 나로 성장하는 게 아니라(이게 무슨 성장이냐...), 지금처럼 내가 옳다고 믿는 쪽으로 성장하겠다. 사고를 확장하고 시야를 넓혀야지. 그의 성장도 더불어 지켜보고 싶었는데, 그게 나의 큰 기쁨이었는데, 이제 앞으로 볼 수 없겠구나.
당신이 나의 사백만불 이었던 것처럼, 나 역시 당신의 사백만불이었다.
아 배가 너무 고프네. 뭣 좀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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